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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스무살> '하노라'의 변화, 그 이름에 담긴 의미는?

너의길을가라 2015. 9. 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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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금토드라마 <두번째 스무살>은 '38가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 캠퍼스 로맨스 드라마'다. 전반적으로 발랄한 분위기를 띠고 있지만, 이 드라마가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스무 살'로 돌아간 '하노라(최지우)', 억압된 채 살아왔던 그녀가 '캠퍼스' 생활을 통해 변화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두 번째 스무살>은 우리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선물한다. 그 함의(含意)들을, 그 즐거운 고민을 지금부터 함께 나눠보자.



'-노라' : 동사의 어간이나 선어말 어미 ‘-으시-’, ‘-었-’, ‘-겠-’의 뒤에 붙어, 어떤 행동에 대하여 주관적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


우선, 우리는 '하노라'라는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라'는 '어떤 사실을 선언하거나 공포할 때 쓰는 종결 어미'이면서, '자기 동작을 위엄 있게 말할 때의 종결 어미'이기도 하다. "나는 이겼노라", "그대들에게 명하노라"와 같이 활용할 수 있을 텐데, 아무래도 구어체(口語體)가 아니라 다소 낯설 수 있겠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 속 등장인물의 이름에 그 캐릭터의 성격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최근의 작명법(作名法)을 고려해 볼 때, '하노라'가 얼마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인물로 변화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왠지 '하노라'라는 이름을 듣거나 혹은 말할 때마다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펴지는 듯한 기분이 들지 않는가? 이름이 갖는 '힘'이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히 언어적 · 면, '라'못한 것이 된다. 좀더 시야를 넓혀보자. 우리는 그 이름이 노르웨이의 극작가이자 근대 사실주의 희극의 창시자인 헨리크 입센의 대표작 『인형의 집의 '노라'와 같다는 사실을 캐치해야 한다. 사실 같은 건 '이름'만이 아니다. 캐릭터를 비롯해 그 '정신'까지, <두 번째 스무살>의 '하노라'는 『인형의 집의 '노라'의 현신(現身)이라 할 만하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은 '아내' 또는 어머니'로서 '기능(機能)'해왔다. 그 자체로 존재하기보다는 특정한 역할에 고정된 채 억압되고 짓눌려왔던 것이 사실이다. 『인형의 집의 '노라'는 이런 인습과 편견을 거부하고 '자아(自我)'를 찾아 나선다. 아내이자 어머니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변화를 선택하는 '노라'와 '하노라'는 판박이처럼 닮아 있다.




내 이름은 하노라.

나는 1978년에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두 살 때 췌장암으로 돌아가시고..

엄마는 네 살 때 재혼해서 떠났다.

할머니가 나를 키우셨다.

그러다 민수가 생겼다.

그래서 결혼하고 민수를 키우고.. 키우고.. 키우고..

그리고 죽는다. 6개월 후에...


던, 은 소녀 '하라'는 19상 '신'다. 꿈과 미래를 모두 내려놓은 채 자신에게 주어진 '내''니'라는 역할을 직면해야 했다. 병원 측의 착오로 췌장암에 걸렸다고 믿게 된 스스로의 을 돌아보는 장면은 눈물을 자아낸다.


'이름'과 달리 그녀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은 거의 없었다. 덜컥 아이가 생기면서 결혼을 하게 되고, 그 후로 남편을 따라 독일로 떠나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하노라는 에 '신'다. '나는 누구일까?', '내가 정말 원했던 삶은 뭐였지?'라는 의문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하노라'는 결심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1년 365일 곱하기 하루 24시간 곱하기 38살 하니까 33만 시간이 넘거든? 근데, 남은 시간이 4,320시간이야. 나 왜 이렇게 억울하지? 속상하지? 나 왜 몰랐지? 그러니까 이렇게 갑자기 빨리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난 못해 본 게 너무 많아. 나 뭐 할까? 다 해볼려구."


처음에 '하노라'가 대학에 입학하기로 결심했던 이유는 웃프게도 심리학과 교수인 남편의 높은(?) 수준을 맞취기 위해서였다. 일상생활에서도 심리학 관련 용어를 사용하는 남편의 준을 따라잡으면 는 순진한 믿다. 이러한 설정만으로도 '하노라'가 얼마나 종속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랬던 '하노라'가 제 '자신을 위해' 대학을 다니기로 결심한다. 다. 다. 더 이상 '엇'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그런 '하노라'에게 감정 이입하고 응원하게 된다. 그녀의 모습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하노라'를 각성(覺醒)시키는 매개(媒介)가 '죽음'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무엇일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두려움과 공포로 다가오지만, 때로는 인생을 뒤흔드는 엄청난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죽음을 앞둔 하노라가 더 이상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더 이상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설정은 현대 사회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삶을 되찾는 결심을 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상정(想定)하는 정도의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려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만약 하노라가 자신이 췌장암에 걸렸다는 오해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삶이 '억울'하고 '속상'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들에게 씁쓸한 절망을 안겨준다. 답은 알지만, 실천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랄까?


설령, 곧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두 번째 스무살>는 충분히 의미 있다. 물론 이 드라마의 주요 타깃은 '여성'일 테지만, 굳이 범위를 한정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노라'는 상징적인 이름일 뿐이다. 이 드라마가 던지는 메시지는 '나'를 잊은 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모든 '노라'들에게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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