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관계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고, 보수(수구) 세력들은 '종북 사냥(빨갱이 사냥의 업그레이드 버전)'에 여념이 없다. 인사는 망사에 가깝고(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는 정말 처참한 수준), 신뢰와 믿음의 정치인이라며 자신을 홍보하는 GH는 스스로 공약들을 폐기하고 있다. 야권은 여전히 우왕좌왕하고 있고, 안철수의 복귀도 그다지 반갑지 않다. 이쯤되면 '비관주의'가 활개를 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워드 진의 말처럼 우리는 '비관주의'를 믿어선 안 된다. '비관주의'의 신봉자가 되어 그 영향력 아래 머물러선 안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정도의 암울한 상황은 수도 없이 많았다. 너무 많아서 역사책을 조금만 뒤적여도 쉬이 찾을 수 있을 정도 아닌가? 물론 텍스트로 접하기 때문에, 그 절망의 깊이를 짐작하지 못할 뿐이다. 어쩌면 역사라고 하는 것은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상황들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역사는 끊임없이 움직여왔다. 그 움직임 속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서로에게 너그러이 '희망'이 되어주었다.
발걸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이 반드시 100%의 확신인 것은 아니다. 무겁고도 힘든 상황에서 한걸음 한걸음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늘 그래왔듯 단 1%의 가능성이다. 역설적이게도 GH 정부의 실패, 혹은 GH 정부가 안겨주는 실망이 크면 클수록(지금 하고 있는 짓을 봐선 실패와 실망이 거듭 될 것 같은데..) '희망'은 커져갈 것이다. 물론 때로는 '역행'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에겐 수없이 많은 1%들이 남아 있다.
이대로 '비관주의'에 빠져 있기에 우리들의 가능성은 너무나 크다.
'사회를 듣는 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덕 불감증이 만연한 사회, 그로부터 나는 자유로운가? (0) | 2013.04.10 |
---|---|
전쟁 가능성은 없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0) | 2013.04.09 |
외국인 노동자 문제, 진정한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 (2) | 2013.04.04 |
공감이 결여된 사회는 미개사회에 지나지 않는다 (0) | 2013.04.03 |
'너'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다 (0) | 2013.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