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너'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다

너의길을가라 2013. 4. 2.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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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겪는 여러 가지 불행은 일부분은 사회제도에, 일부분은 개인적인 심리에 그 원인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심리도 사회제도의 산물이다. 


-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의』-



연쇄살인범 A가 있다고 치자. 그는 잔혹한 수법으로 여러 명의 사람을 죽였다. 이후 경찰에 의해 체포됐지만, 범행을 반성하기는커녕 태연하게 앉아 있다. 언론은 그런 A를 보도하기 시작한다. '극악무도한 A'로 시작해서 '사이코패스 A'까지.. 언론은 A라는 한 인간을 낱낱이 파헤치고, 그를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였다는 식으로. 사람들은 A를 사형시켜야 주장한다. 분노에 찬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 그렇게 한동안 태풍이 몰아닥치고, 사회는 다시 안정을 되찾는다. A는 서서히 잊혀진다. 언젠가 또 다른 A가 나타날 때까지. 


A를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올바른 접근방법일까? 단지, 그를 별종으로 취급해서 짓밟고 매도해서 A와 우리는 다른 존재라고 위안을 삼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일까? 


우울증을 앓는 B가 있다.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이루지도 못하고, 공포와 불안으로 하루종일 괴로워한다. 때로는 슬픔과 절망이 찾아온다. 결국 B는 자살을 선택한다. 만약 B가 유명한 사람(가령 연예인)이라면,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될 것이다. B의 죽음의 원인에 대한 추측성 보도들이 이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B의 죽음을 애도한다. 슬픈 일이지만, 나와는 별개의 일처럼 취급할 것이다. 만약 B가 유명인이 아니라면 그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한 채 조용히 잊힐 것이다. 


과연 B는 '특별한 케이스'일까? B는 보통 사람과 달리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정신적으로 약하고 무기력한 사람이었을까? B를 예외적인 케이스로 치부하고, 격리시켜버리는 것이 과연 온당한 처사일까? 


'불행'은 상존한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감내해야 할 몫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불행은 '사회제도'에 따라 상당 부분 줄일 수도 있고, '사회제도'를 통해 함께 견디고 극복할 수도 있다. 물론 좀더 예민한 사람도 있고, 매사에 불평불만인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상대적으로 나약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타인에 대해 의존적인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단지 '개인적인 심리'의 탓으로 귀속시키는 것은 아주 쉽고 편한 방법이다. "네 문제야. 그러니까 너 스스로 해결해야 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근본적인(근원적인) 이유가 있는 법이다. 가령, 가정 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학교에서 부당하게 차별적 대우를 받았을 수도 있다. 또,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연쇄살인범 A와 우울증으로 자살한 B는 결국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만들어낸 현상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자본주의가 극으로 치달으면서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배금주의가 만연한 세상이 아니던가? 사람의 가치는 곤부박질쳤다. 가족 간의 사랑과 유대는 끊어졌고, 이웃간의 끈끈한 관계는 사라진 지 오래다. 경쟁을 통해 끝없이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가기를 강요하는 사회, 모든 것을 '너의 탓'이라며 한 개인을 정죄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마찬가지로 한 개인이 안고 있는 심리적 불안은 그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것이다. 당연히 그 불안을 해소하는 노력을 사회 전체가 함께 해야 한다. '공감'해야 하고, '연대'해야 한다. 더 이상 외롭게 홀로 싸워선 안 된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녀)의 문제는 곧 내 주변 사람의 문제이고, 나의 문제이며, 우리 아이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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