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투신하려는 딸 구하려다 추락사한 엄마, 빠진 한 문장이 바꾼 실체적 진실

너의길을가라 2015. 2. 10.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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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보도의 기본은 '정확'한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함으로써 독자(혹은 시청자)의 알권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굳이 기본 중의 기본을 글의 서두에서부터 언급하는 이유는 역시 '기본이 잘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기본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했던가? 현재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을 가장 적확하게 보여주는 단어는 '기레기'일 것이다.


- 미드 <뉴스룸>의 한 장면 -


'기레기'는 <피노키오>, <힐러> 등 여러 드라마의 소재가 됐을 정도로 대한민국 사회의 중요한 화두(話頭)다. 물론 언론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책임을 '기자'들에게만 돌리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한때 기자정신으로 무장한 채 불의와 맞서 싸우던 기자들을 단순한 월급쟁이 직장인으로 만들어버린 '언론사'의 책임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오늘날 언론 보도의 기본은 '어떻게든 빨리' 기사를 송고하는 것이다. 어차피 내용이야 긁어서 붙여넣기를 하면 그만이니까 제목을 최대한 자극적으로 뽑는 것이 핵심이다. 당연하게도 부정확한 정보가 인터넷 공간을 부유(浮遊)하고, 거기에 제멋대로 살이 붙여져 악성 루머로 변질되기 일쑤다. 혹은 단편적인 사실들이 사건의 실체를 삼켜버리고, 진실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눈을 가린다. 어디 하루 이틀의 일인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려던 딸을 구하려다 어머니가 추락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10일 오전 8시 20분께 청주시의 한 아파트 인근 도로 바닥에 이 아파트 2층에 사는 A(58)씨가 쓰러져 숨져 있는 것을 인근 주민이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A씨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려던 자신의 딸(28)을 제지하려다가 추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딸은 투신하지 않았다. 경찰은 투신하려는 딸을 제지하려던 A씨가 발을 헛디뎌 추락한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이 시각 현재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많이 본 뉴스' 1위는 <연합뉴스>의 김형우 기자가 작성한 아파트서 투신 시도 딸 구하려던 어머니 추락해 숨져 라는 기사이다. 기사는 단 네 문장으로 소략하게 구성되어 있고, 내용은 별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제목처럼 투신을 시도하던 딸을 구하려다 어머니가 추락해 숨졌고, 딸은 뛰어내리지 않고 살았다는 안타까운 내용이다.



위의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왜 인근 주민이 발견하고 신고하냐? 딸은 뭐하고?", "딸!! 니가 죽인거야 니 어머니를 잡것아", "엄마를 죽인 죄책감...평생 끌어안고 고통속에 살아라...생각없는 멍청한 자식아..." 댓글의 내용은 딸에 대한 비난 일색이다. 심지어 저주까지. 어쩌면 당연한 반응처럼 보인다. 위의 기사'만'을 놓고 봤을 때 말이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은가? 도대체 딸(28)은 왜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도 2층에서 말이다. 상식적으로 자살을 하고자 한다면, 훨씬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 이유를 모른 채 딸을 비난하는 것은 조금 성급한 행동은 아닐까? 그래서 같은 내용을 다룬 또 다른 기사가 없는지 검색을 해봤다.



<헤럴드경제>의 아파트 투신 시도 딸 구하려던 엄마 추락사..딸은 안뛰어내려 에는 단 한 문장이 추가되어 있었다. 바로 '최근까지 정신장애를 앓던 딸은 뛰어내리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28살의 여성이 아파트 2층에서 투신을 하려고 했던 이유 말이다. 단 한 줄만으로 사건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지 않는가? <쿠키뉴스>에는 보다 자세한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1층 주차장 바닥으로 떨어진 A씨는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숨졌다. A씨는 사고 직전 딸(28)이 투신을 시도해 막고 있다고 친인척과 통화했다. 사고 직후 A씨의 딸은 가족의 보호 아래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들은 경찰에서 "A씨가 '딸이 최근들어 정상이상 증세를 보였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유족 등의 말을 토대로 A씨가 투신하려는 딸을 막아서다 발을 헛디뎌 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망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투신하려는 20대 딸 구하려다 추락사한 엄마.. 딸은 무사해 '어쩌다가'


<연합뉴스>의 기사를 읽고 딸에게 비난과 저주를 퍼부었던 사람들이 처음부터 <헤럴드경제>나 <쿠키뉴스>의 기사를 읽었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누군가에게 악담을 하기보다는 그저 안타까운 마음을 가슴 속에 품게 됐을 것이다. 누군가의 잘못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라 아파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누굴 탓할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 구글 이미지 검색 -


물론 <연합뉴스>의 보도가 '거짓'이라고는 할 수 없다. 분명 김형우 기자는 '팩트'를 썼다. 투신하려던 딸을 구하려다 어머니가 죽은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 글의 서두에서 '정확한 정보'를 강조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신속함'에 방점이 맞춰지면, '왜?'라는 질문을 할 틈이 없다. 그저 '껍데기'만 남게 된다. '딸이 뛰어내리려고 했는데, 엄마가 구하려다가 죽었어'라는 껍데기 말이다.


'신속'이 '정확'을 앞질러버린, 아니 압삽한 지금의 언론은 쉽사리 바뀌지 않을 것이다. '빠름'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급한 성미가 변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럴수록 부정확한 정보, 전체를 비추지 못하는 단편적인 사실만으로 채워진 뉴스들이 언제든 우리를 현혹(眩惑)하고 눈을 가릴 것이다. 애꿎은 대상에 화풀이를 하게 만들거나 불필요한 분노를 게우게 할 것이다. 바로 오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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