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노동개혁의 방향.. 노동 유연화인가, 노동시간 유연화인가?

너의길을가라 2015. 7. 24.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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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해킹의 미스터리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가운데 정치권은 애써 '노동개혁'이라는 화두에 집중하는 분위기다. 물론 그 중심에는 박 대통령과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 16일 박 대통령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19분 간의 독대 이후 '노동개혁'은 하반기 국정 현안의 가장 핵심적인 아젠다(agenda)가 됐다.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노동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 내용을 들어보자.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공무원연금 개혁은 완성했고, 이제 노동개혁 부문을 우리가 중점 개혁 목표로 잡아 추진해야 한다" (17일)


"경제 체질을 바꾸려면 경제 비효율성을 제거해야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노동개혁이다. 하반기에는 우리나라 미래를 위해 노동개혁을 최우선 현안으로 삼고 당력을 총동원해 추진하겠다. 노동 개혁은 대한민국 미래를 위해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만큼 어떤 반대나 불이익이 있어도 감수하고 헤쳐가겠다. 내년 총선, 내후년 대선을 앞두고 있지만, 국민과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면 표를 잃을 각오로 노동 개혁을 해나가겠다. (20일)


박근혜 대통령


"노동개혁은 생존을 위한 필수전략이다. 우리 경제의 재도약과 세대간 상생을 위한 시대적 과제이기도 하다. 비정규직 차별화로 대표되는 고질적인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소해야 한다. 노동시장의 유연안정성을 높이고 사회안전망을 촘촘히 해야만 질 좋은 일자리창출과 경제 활성화가 가능하다. 취업 애로를 겪고 있는 청년층이 100만명을 넘고 있다. 청년 개인은 물론이고 가족과 사회 전체의 문제다. 청년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더 많이 제공하기 위해서는 경제 활성화 노력과 함께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반드시 이뤄야 한다" (21일)




김무성 대표는 '표를 잃을 각오로 노동 개혁을 해나가겠다'고 선언했다. 배수진을 친 장수마냥 결연한 태도다. 시야를 가리는 미사여구를 떼어내고 보면, 결국 경제 비효율성을 제거하기 위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말은 '유연성'이라는 단어가 붙은 탓에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로 채색됐지만, 쉽게 말해서 '해고를 쉽게 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박 대통령은 더욱 영리하게 '유연안정성을 높인다'고 표현했다. 해고와 안정성이 함께 쓰인, 이 이율배반적인 언어를 보라!


언뜻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비정규직 차별화로 대표되는 고질적인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소'해야 한다면서 그 방안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인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일자리의 하향 평준화를 이룩하겠다는 의미일까? 이는 2012년 대선 국면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였던 '경제 민주화'에 역행되는 발상이다. 청년 일자리가 문제라지만, 중장년층을 마음껏 해고하고 그 자리에 청년을 끼워넣는 것이 과연 경제 활성화란 말인가? 한 가지만 더 생각해보자. 과연 그 일자리가 양질(良質)의 일자리일까?



새누리당의 이한구 의원은 지난 22일 "앞으로 지속가능한 경제를 만들려고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되는 것이다. 과거 선진국이 영국병, 네덜란드병, 독일병에 걸렸을 때 했던 대타협을 우리도 한번 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병에 걸렸을 때 했던 대타협? 새누리당을 비롯해서 보수적인 색채를 지닌 언론들은 '노동개혁'을 언급하면서 독일의 '하르츠 개혁(Hartz reform)'을 주요 모델이자 논거로 제시한다.


독일의 자동자 회사 폴코스바겐사의 구조조정을 이끌었던 페터 하르츠 관리 이사가 주도했기 때문에 '하르츠 개혁'이라 이름 붙여진 이 노동개혁의 골자는 실업자의 복지를 축소하고,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높이고, 창업을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슈뢰더 총리의 강력한 의지에 기반해서 정부와 노동계, 경영계, 학계가 모두 포함된 위원회에서 노사정 대타협이 성사됐고, '하르츠 개혁'은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단계적으로 시행되기에 이른다.


개혁의 1차적인 결과는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2005년 11.2%에 달했던 실업률이 지난 1분기에는 4.8%까지 뚝 떨어졌다. 청년 실업률도 2005년 14.2%에서 7~8%대로 감소했다. 분명 실업률을 지표로 본다면, '하르츠 개혁'은 성공적이었던 셈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했지만, 독일은 거의 유일하게 청년 실업률이 증가하지 않은 나라이다. 이쯤되면 '하르츠 개혁'으로 대변되는 독일의 강도 높았던 노동개혁의 효과를 자신할 만 하지 않은가?



'하르츠 개혁'에는 명(明)만 있는 걸까? 이쯤에서 2차적인 결과들을, 다시 말해서 '하르츠 개혁'의 암(暗)을 살펴보자. 앞서 살펴본 것처럼 독일의 실업률은 감소했지만, 비정규직은 급증했다. 하르트무트 자이퍼트 전 한스 뵈클러 재단 경제·사회과학연구소 소장은 "하르츠 개혁은 저임금·비정규직 확산으로 이어졌고 독일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정 최저임금제 도입, 파견 규제 강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하르츠 개혁 때문에 독일이 고용 안정을 이뤘다는 실증적 데이터는 없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단체협약을 통한 노동시간 유연화가 고용 보장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해고를 통한 '노동 유연화'가 아니라 노동 시간을 조절함으로써 '노동시간 유연화'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이는 현재 야권과 노동계가 정부와 새누리당의 노동개혁에 반대하면서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일자리 나누기'와 '최저임금 인상'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르츠 개혁'으로 고용은 증가했지만, 노동자의 평균 실질임금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실업급여 등 복지의 축소는 결국 사회 양극화로 되돌아왔다. 양질의 일자리는 사라지고, 노동자들은 더욱 열악한 일자리를 받아들여야 했다. 정의당의 심상정 대표는 "고용 유연성을 높여서 지금 일자리를 하향평준화 하자는 것이 정부의 추진방향이다. 그런데 이것은 개혁이 아니고 개"이라고 말했다. 또, "1900만명의 노동자들 중에 월급을 200만원도 못 받는 분들이 940만명"이나 되는 현실을 지적했다.


해고라는 이름의 '노동 유연화'인가, 노동시간 조절을 통한 '노동시간 유연화'인가? 노동시장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월급 200만 원도 못 받는 940만 명의 목소리는 무엇일까? 그보다 사정이 조금 나은 960만 명의 목소리는 무엇일까? 상향 평준화가 아니라 하향 평준화가 우리의 길일까? 유연함이 넘쳐 붕괴 직전에 내몰린 노동 시장을 살아가야 할 '청년'들의 목소리는 무엇일까? 혹시 우리는 눈 앞의 이익에 취해 몇 걸음 뒤의 공멸(共滅)을 놓치고 있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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