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積弊) : 오랫동안 쌓여 온 폐단
적폐 청산. 지난 19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지금의 대통령이 되신 분께서 누누이 강조했던 말이다. 그가 큰 목소리로 당당히 외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것이 국민들의 지엄한 요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국민들은 부정부패와 비리가 판치는 절망스러운 현실에 분노했고, 달라지지 않는 지긋지긋한 현실에 염증을 느꼈다.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절박함이 용솟음쳐 하나의 거대함 흐름을 만들어냈다. 국민들의 그와 같은 인식은 tvN <비밀의 숲>에서 이창준 청와대 수석비서관(유재명)이 유서에 남긴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다.
지금 현실은 대다수의 보통 사람은 그래도 안전할 거란 심리적 마지노선마저 붕괴된 후다. 사회 해체의 단계다.
어쩌면 국민들이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는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국민들은 단호히 변화를 바랐다. 이제 대통령이 바뀌었고, 정권도 바뀌었다. 그래서 적폐 청산은 이뤄지고 있는가. 대답은, 대단히 아쉽지만 유보적이다. 분명 일정한 변화가 감지됐고, 또 그런 움직임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지난 정권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적폐 청산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는 '적폐'라는 단어의 뜻에 담겨 있다. 적폐란 무엇인가. 오랫동안 쌓여 온 적폐를 말한다.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의 '오랫동안' 말이다. 박근혜의 4년과 이명박의 5년, 그렇게 9년을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도려내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까. 그 9년의 세월이 만들어 낸 해악이 참으로 크지만, 그 시기를 잘라낸다고 해서 이 땅의 모든 적폐가 사라지게 될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밖으로 조금 삐져 나온 줄기를 잡고서 아무리 착실히 따라가도 그 실(본)체를 마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이다.
누군가는 대한민국이 탄생하던 현대사의 꿉꿉함을, 누군가는 친일파 등 온갖 기회주의자들이 득실대던 근대사의 비릿함을 떠올릴 테고, 또 누군가는 그 실체를 찾기 위해 조선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영화 <군함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뜨겁다 못해 타들어가는 논쟁들을 보라.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끊임없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다시 광주를 이야기하는 <택시운전사>를 보라. 사과와 반성 없는 국가권력은 국민들의 가슴에 피멍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애초에 '적폐 청산'이라는 말은 공허한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명확한 범위와 개념을 설정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랫동안' 쉼없이 '쌓여왔기' 때문에. 그래서 수많은, 또 강고한 '퇴적물'을 만들어냈기에. 곳곳에 문어발처럼 뻗어 있고, 진드기처럼 딱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하나를 제거한다고 해서 몸통이 사라지는 게 아니고, 설령 몸통을 발견하다고 하더라도 그 '거대함'에 엄두가 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쯤되니 '머리'를 건드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 돼 버렸다.
"전 대한민국 GDP의 30%를 책임져 온 사람입니다. 평생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데 헌신했고, 아시겠지만 이 땅의 수백 만 젊은이들을 일자리에 불러모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죄라하고 지탄의 사유로 삼는 오늘날 반기업정서에 저와 같은 기업인들은 설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저는 그 결과가 무엇이 될지 매우 두렵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조국이 집단 한풀이에 취해서 21세기 선진국 대열에서 추락할까 두렵습니다. 저, 이윤범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검사들이 날 법리해석상 옭아맬 수 있을지 몰라도, 난 대한민국 거대한 역사 앞에서 무죄입니다."
물론 이 땅의 모든 적폐를 포괄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적폐의 뿌리는 찾는 한편, 당장 맞서야 할 적폐의 모습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 원형을 이윤범 한조그룹 회장(이경영)에게서 찾을 수 있다. 검찰에 출두한 그는 다짜고짜 국민들을 '겁박'하고 나선다. 생소하지 않은 모습이다. '대한민국을 먹여 살렸다'는 오만방자한 태도와 '일자리'를 무기로 정부를 협박하는 불손한 자세는 저들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았다. 또, '사회 공헌을 했다'는 명목 하에 온갖 '특혜'들을 누려왔던 게 저들 아니었던가.
적폐는 자본을 거머쥐고, 돈을 무기로 권력을 제멋대로 주물렀다. 사정기관을 자신들의 발 아래 뒀고, 언론을 자신들의 입으로 마음껏 사용했다. 이창준은 경고한다. 해악의 단계를 넘어 사람을 죽이고 있는 부정부패를 더 이상 방치하면 안된다고 말이다. 이대로는 시스템 자체가 무너진다고 말이다. 이창준은 '정상적인 방법으론 이미 치유 시기를 놓쳤다'고 판단했고, '무너진 시스템을 복구시키는 건 시간도 아니요, 돈도 아니'라 말한다. 그는 '사람의 피'만이 해법이라 생각했고, 그리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쳤다.
"근데, 남해는 왜 보낸데요?"
"뭐, 이윤범이나 고위급들이 지금은 구속됐지만, 그게 얼마나 가겠습니까? 또, 뭐 특별사면이다 뭐다 해서 금방 풀려나겠죠. 아마도 그걸 대비한 거 같아요."
남해로 좌천된 황시목 검사(조승우)는 한여진 경위(배두나)와의 대화에서 '그게 얼마나 가겠냐?'고 말한다. 여기에서 적폐 청산이 어려운 두 번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윤범과 고위급들은 왜 금방 풀려날 수밖에 없는가. <프레시안>은 '개혁과 적폐 청산은 무엇으로 하는가(김정남)'를 통해 '적폐로 적폐를 청산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가 공직 배제의 기준으로 '5대 원칙'을 제시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인사청문회 대상 22명 가운데 15명(68.2%)이 5대 원칙 중 하나 이상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황시목이 한여진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는 브로커 박무성(엄효섭)이 7년 동안 정계와 재계 등에 접대를 해왔는데, 그걸 거절한 사람이 딱 두 명뿐이었다고 했다면서 그 한 명이 황시목 자신이라 말한다. 드라마 속의 대사와 현실은 얼마나 다를까. '밥 한 끼로부터 시작된 선의의 대접'이 결국 약점이 되고, '이 정도 쯤이야'라는 생각이 곧 치부가 된다. 완벽할 만큼의 도덕성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외치는 적폐 청산은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이창준이 왜 황시목'만'이 할 수 있다고 말했는지 그 까닭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부정부패가 해악의 단계를 넘어 사람을 죽이고 있다. 기본이 수십, 수백의 목숨이다. 처음부터 칼을 뺐어야 했다. 첫 시작부터.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조차 칼을 들지 않으면 시스템 자체가 무너진다."
'적폐 청산'이라는 말이 갖는 당위는 너무 분명하지만, '적폐 청산은 가능할까?'라는 물음은 그 당위만큼 쉽사리 대답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적폐'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우선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 경계를 짓기가 쉽지 않다. <비밀의 숲>의 '이윤범'과 같이 똑떨어지는 정답을 찾기란 참으로 어렵다. 설령 찾아냈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이 더욱 만만치 않다. 흔들림 없이 외길을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황시목'과 같은 '칼'이 우리에겐 있는가.
<비밀의 숲>은 황시목에게서 '감정'을 빼앗아버렸다. 그 정도의 어드벤테이지(?)가 아니면 상대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말해주는 건 아닐까. 그러나 너무 낙담하진 말자. 황시목은 "아직 기회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 집행관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는 헌법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있습니다. 헌법이 있는 한 우린 싸울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괴물이 된 이창준은 자신을 피의 제물로 바쳤고, 윤세원 과장(이규형)은 사적인 복수를 구원의 통로로 삼았다.
하지만 황시목은 단호히 말한다. 우리의 무기는 '헌법'이고, 모든 복수는 공적인 방식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역시 더욱 많은 '황시목'들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런 '황시목'들을 지켜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동재 검사(이준혁)처럼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갈 뿐이다. 이것이 바로 <비밀의 숲>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다. 적폐 청산에 나서야 할 문재인 정부와 이를 뒷받침해야 할 우리들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가야 할 숙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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