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7일 새벽 1시 강남역 인근 공중화장실에서 발생한 이른바 '강남역 살인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과 함께 명확한 화두를 던졌다. 온라인을 넘어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던 '여혐(여성 혐오, misogyny)' 현상을 또렷이 인지시켰고, 이 문제가 우리 사회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심각한 사안이라는 것을 각인시켰다.
경찰은 '강남역 살인 사건'을 '조현병(Schizophrenia, 調絃病) 환자의 묻지마 범죄'라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른 피의자 A(남, 34) 씨가 화장실에 들어가 대기하고 있다가 남성 6명은 그대로 보내고 '여성'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질렀고, 경찰 조사에서 "평소 여자들에게 무시를 많이 당해 왔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점을 미뤄볼 때 단순히 조현병 '탓'만 하는 건 사건의 부분적 진실만 쫓은 듯 하다.
이 사건을 '실체적으로 받아들인' 여성들이 남긴 '#나는 살아남았다'라는 해시태그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감과 공포는 엄청나다. 그건 남성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하나의 사건에 하나의 인과관계만 존재하라는 법은 없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어떤 결과는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하나의 까닭'만을 찾기 위해 분주하기보다 다층적인 분석과 접근이 필요하다.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가장 나쁜 사람이 가장 아픈 사람이라고. 폭력적이고 괴팍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가 성장기에 중요한 양육자로부터 그와 같은 것을 받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성장기 아이에게 단 한명의 어른이라도 따뜻한 눈길을 주고,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고, 잠재력을 믿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픈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변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마음의 문제를 인식하고 보살피기 시작한 지 십년이 조금 넘었다. 이즈음에는 남자들도 내면에 마음이라는 것이 있으며 그것이 가장 힘이 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듯하다. 아픈 남자가 나쁜 남자가 되지 않도록 개인의 인식과 사회 시스템이 함께 변화해야 할 것이다."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고, 세상이 엄청나게 시끄러울 즈음에 나는 김형경의 『오늘의 남자』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2013년 출간된 『남자를 위하여』의 후속편인 이 책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여자가 알아야 할 남자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살아가야만 하는(혹은 살아남아야 하는) 여성들의 '지침서'와 같은 역할이라고 할까?
김형경이 계속해서 '남자'에 대해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한 인터뷰에서 "현실에서 만나는 여성들은 남자의 실체에 대해 놀라운 정도로 무지했다. 그들은 남자 인간을 보는 게 아니라 내면의 남자 환상을 원하고 있었다"면서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여성들이 자존감으로 무장한 채 주체적으로 변해가는 동안 남자들은 자기 내면을 알지도 표현하지도 못한 채 여자들을 못 마땅해하는 상태로 머물렀"다고 설명했다.
"남자는 여자가 바깥세상에서 경쟁을 끝내고 돌아갔을 때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대상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가정에서 아내의 보살핌을 받으며 싸움에서 다친 심신을 회복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갈 힘을 얻고 싶어한다. 아내가 자신보다 돈을 많이 벌면 가정의 패권을 두고 아내와 다투는 느낌을 갖게 되고, 아내가 일에서 자신보다 성공하면 상대적 열패감까지 안게 된다."
"남자들은 그것으로 모든 대화를 했다고 생각한다. 술을 따라주는 것이 안부를 묻는 일이고, 술잔을 부딪치며 상대를 위로하고, 각자 자기 잔의 술을 마시면서 슬픔을 느낀다. 술자리에서 마주 앉기, 함께 술 마시기, 함께 취하기, 그 모든 것을 뭉뚱그려서 남자는 위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서로 위로하는 말을 할 줄 모르고, 상대방을 감싸안아 편안하게 해주는 행동을 할 줄 모른다."
남자의 실체에 대해 무지한 여성과 자신의 내면을 알지도 못하는 남성이 만나 부부가 되고, 그들의 자녀에게 심리적 문제를 물려주는 악순환의 반복이 메워지지 않는 간극을 만든 것일까? 김형경은 "남자와 여자는 서로 이해하지 못해 늘 갈등을 겪는다. 그 이해를 돕고 싶었다"고 말한다. 『사람의 풍경』에서부터 시작된 '정신분석학'에 기초한 '통찰력'은 이번 책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 김형경 -
1장 아픈 남자, 슬픈 남자
2장 가장과 아버지의 이름으로
3장 남자의 성과 사랑
4장 남자 속의 영웅들
5장 남자의 성장과 나이 듦
5장으로 구성된 『오늘의 남자』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층위(層位)의 남성들이 보이는 태도와 심리를 절묘하게 포착한다. 그 층위는 '나이'이기도 하고, '직업'이기도 하고, '상황'이기도 한데, 김형경은 특유의 진솔한 접근으로 남성들을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따스한 시선을 통해 웅크린 채 '그르릉' 대는 남성들을 감싸 안는다.
김형경은 "이 지면의 글이 남자를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내가 의도했던 일이다. 모든 문제를 외부로만 투사하는 남자들의 마음을 들쑤셔 어떻게든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백하자면 솔직히 조금 불편했다. 남자인 나도 몰랐던 남자에 대해 '이건 좀 아니지 않아?'라고 부정하고 싶은 부분들이 있었다.
대한민국 사회에 뿌리깊은 가부장(家父長)에 비판적이고, 과도한 남성성에 소름 돋아하며 '괜찮은 남자'인 척 하는 자신에 대해 되돌아보게 됐다. 결국 나도 '남자'였음을 깨닫게 됐다고 할까? 그러나 무엇보다 '불편'했던 것은 서두에서 언급했던 '강남역 살인 사건'이 촉발한 성 의식에 대한 논제들 때문이었다. '여혐' 현상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고, 각종 범죄로까지 번지고 있는 상황에서 '여자들이여, 남자들을 이해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진짜 불편했던 부분은 김형경이 취하고 있는 '과도한 이해'였다. 그는 남자의 실체를 드러내는 한편 여자들에게 '이해'를 촉구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가 공존하는 방법은 '이해'라고 말하는 그의 논조가 나이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내게 소망이 있다면 '여자, 소설가'로서 이 남성 중심 세상에서 추방당하지 않고 무사히 살아가는 것"이라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나서야 또 다른 이해가 싹트기 시작했다.
여자의 시선으로 '남성의 실체'를 폭로하는 데 그 이상의 태도를 취하기는 어려웠으리라. '남자들의 마음을 들쑤'시는 것, 그리고 여전히 남성 중심 사회에서 '생존'해야만 하는 여성들에게 '이해를 바라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쯤되니 '이해'라고 하는 태도는 방어적이라기보다는 '불가피'한 것이고, 여자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생존 수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남자가 변해야 한다. 불편함을 넘어 불쾌함을 느껴야 한다.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되돌아보고 깨져야 한다. 『오늘의 남자』는 '남성 중심 세상에서 추방당하지 않고 무사히 살아가'야 하는 여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전선'이다. 남성들이 만들어가는 여혐 현상과 여성에 대한 일상적 폭력이 만연한 '현실'에서 그 이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리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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