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분야에 천착(穿鑿)해 경지에 이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드는 일은 매우 설렌다. 몸으로 부딪쳐 얻은 생생한 경험들이 세월을 통해 깊이 숙성(熟成)되면 보편적인 견해를 얻는 동시에 일반론을 뒤집는 개별적 인식이 생겨나기도 한다. 그런 성취를 이뤄낸 '장인(匠人)'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탁견(卓見)'이라 이름붙여도 무방하다.
"이게 뭡니까? 부장님? 아니, 자연 다큐멘터리라니요?"
"아무거나 다 할 수 있다며? 그냥 산으로 들로 놀러간다고 생각하고 만들어 봐! 재밌을지도 모르잖아!"
-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 P. 18 -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을 쓴 최삼규 PD는 자연 다큐멘터리에 자신의 인생을 건 사람이다. (그 시작은 느닷없이 찾아왔지만, 그렇게 맺어진 인연은 어느새 천직이 돼버렸다.) 첫 작품인 <곤충의 사랑>을 시작으로 <어미새의 사랑>, <DMZ는 살아 있다>, <황새>, <한국 표범>, <푸른 늑대>, <야생의 초원, 세렝게티> 등 지난 30여 년 동안 무려 50여 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최삼규 PD에 대한 '홍보'를 좀더 하자면, 그는 '한국방송대상' TV부문 최우수상, '시카고 국제 TV 페스티벌' 우수상, 'ABU(Asia Pacific Broadcasting Union)' 특별상, '백상예술대상' TV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유능한 다큐멘터리 PD다. 그가 인정받은 '유능'이란 원하는 영상을 얻을 때까지 끈기있게 기다리는 참을성과 인내, 생태계와 그 터전에 자리잡은 생명체들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최 PD가 제시하는 다른 관점이란 무엇일까? 힌트는 책의 표지에 잘 나타나 있다. 가젤과 누, 얼룩말 등의 초식 동물 무리가 어찌된 일인지 자신들의 '천적'이자 두려운 존재인 사자 주변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사자들이 보여주는 평온함이야 스스로를 강자로 인식하는 여유에서 나온다지만, '먹잇감'에 불과(!)한 초식 동물들이 저토록 느긋하다니! 기묘한 공존이 아닐 수 없다.
책을 '팔기 위해서' 아무래도 인기(?) 동물인 사자의 모습이 필요했겠지만, 표지의 저 사진은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의 내용을 가장 상징적이고 축약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또, 최삼규 PD가 지난 30여년 동안 관찰하고 탐구하면서 얻은 '동물의 왕국'에 대한 '탁견'이 담겨있기도 하다. 그가 말하는 동물의 왕국, 즉 '야생 생태'는 바로 이런 곳이다.
생물학자들은 야생 생태를 '약육강식', '적자생존', '자연도태'라는 세 단어로 살벌하게 표현하는데, 내가 세렝게티 초원에서 깨닫게 된 것은 이곳은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이 각자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가점을 잘 살리면서 서로 균형 있게 생존해 나가는 '조화와 공존'의 세계라는 사실이다. 그런 자연에는 갑질 하는 강자도 없고, 그래서 당하는 약자도 없다. 오로지 섭리에 따르는 자연의 조화만 있을 뿐이다.
-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 P. 9 -
엄밀히 말하면 '약육강식(弱肉强食)'과 '적자생존(適者生存)', '자연도태(自然淘汰)'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약육강식이 문자 그대로, 약한 존재가 강한 존재에게 잡아 먹히는 냉혹한 '먹이사슬'을 의미한다면, 적자생존과 자연도태는 '적응력'을 뜻한다. 사막에서 살아남는 것은 '물리적인 힘'이 강한 사자가 아니라 낙타와 같이 며칠 동안 물을 마시지 않아도 버틸 수 있도록 '적응'된 동물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세 단어가 모두 '살벌'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의미의 분리없이 혼용한 것은 다소 아쉽지만, 어찌됐든 최삼규 PD가 이해한 야생 생태는 '갑질하는 강자'와 당하기만 하는 약자'로 구성된 살벌한 공간이 아니라 '조화와 공존'의 세계였다. 비록 사자나 치타와 같은 육식 동물들은 초식 동물을 사냥해서 그 고기로 생명을 이어가지만, 인간과 달리 '배가 부르면 절대 다른 동물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한다.
사냥을 통해 배가 잔뜩 부른 치타(나 사자)는 몇날 며칠 잠만 자며 시간을 보낸다. 표지의 사진처럼 '느긋한' 오후의 한 때를 보내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가젤들이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인데, 단잠에 빠진 치타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가젤의 모습을 보고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야생 생태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딱 자기가 생존할 정도의 먹이만을 구하는 것.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자연은 딱 그 정도만의 살생, 육식 동물이 생존할 정도의 살생만을 허용하는 셈이다. 반면, 그 수많은 초식 동물은 딱 1마리만 육식동물에게 먹이로 희생됨으로써 무리 전체의 평온이 유지되는 것이다. 30퍼센트의 확률로 어렵사리 성공하는 사냥, 어쩌면 그것은 자연이 정해준 야생의 황금률일지도 모른다."
-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 P. 9 -
그밖에도 이 책에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다. 새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2장과 인간의 발길이 끊어진 채 보존되고 있는 DMZ에서의 촬영 뒷이야기들이 담긴 4장도 흥미롭게 읽혔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덜한 침팬지에 대해 다루고 있는 5장은 분량이 가장 많았는데, 집중력이 다소 떨어진 상태에서 페이지를 넘기기에 급급했음을 고백한다.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을 통해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생이 뒤따르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생각해보라. 다큐멘터리 안에는 수많은 '결정적 장면'들이 요구되는데, 그 순간을 포착한다는 게 과연 쉬운 일이겠는가. 사자가 사냥에 성공하는 그 순간을 생생하게 잡아낸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큼직한 동물들은 쉽게 찾는다고 하지만, 작은 새들을 드넓은 땅에서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무거운 장비를 들고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DMZ를 탐험하는 건 또 어떨까. 수준 높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TV 브라운관을 통해 편안하게 시청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축복'과도 같은 일이란 생각이 든다. 적어도 그 장면들에 담긴 땀방울의 고단함을 한번쯤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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