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손님은 왕이다? 혹시 당신도 진상 손님이었나요?

너의길을가라 2014. 9. 25. 08:15
반응형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만큼 '감정노동'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앨리 러셀 혹실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가 『관리된 심장(The Managed Heart)』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처음 사용한 감정노동은 감정관리 활동이 직무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대인 서비스업 종사자를 의미한다.



서비스업종이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감정노동자'도 자연스럽게 급증했다. 그리고 '감정노동자'에 대한 실태조사 결과는 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심각했다. 더 욱 심각한 문제는 생애 첫 노동을 경험하는 청소년들도 이러한 '감정노동'의 스트레스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표현해볼까? 당신의 아들 · 딸이 감정노동으로 인해 지금 이 순간에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있다.


청년유니온이 편의점과 패스트푸드점, 음식점, 술집, 커피전문점, 빵집 등 주로 서비스업종에 종사하는 15~29세 아르바이트생 22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감정노동 실태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 내에 손님으로부터 무리한 요구를 받았다고 응답한 비율이 무려 53.8%(121명)에 달했다. 인격 무시 발언을 들었다는 응답은 50.7%(114명) 였고, 욕설이나 폭언을 들었다는 응답도 39.6%(89명)이나 됐다. 심지어 성희롱이나 신체접촉을 당한 케이스도 15.1%(34명)에 이르렀다.



청년 알바들이 경험한 '진상 손님'들의 황당한 요구들을 잠시 살펴보자. ' 절반 정도 마신 소주를 키핑해달라', '너무 비싸다. 값을 깎아 달라', '같이 나가서 밥 먹자', '연애하자'로 시작한 요구들은 '거부'를 맞이한 순간 폭언이 되어 돌아왔다. 갑자기 화를 내면서 인격적 모욕을 하는 진상 손님에게 나이 어린 아르바이트생들은 '항상 웃거나 즐거운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192명, 85.4%). 대한민국 사회에서 손님은 왕이기 때문이다.


호프집에서 근무하는 류 씨(26세)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할아버지 손님이 오셨어요.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뽀뽀를 해달라는 거예요.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니가 내 딸 같다'며 '뽀뽀를 해달라'는 거예요."라며 자신이 겪은 불쾌한 사연을 들려줬고, 김 씨(25세) 역시 "사장은 확실히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죠. 저 보고 딸 나이라서 예쁘다고 해놓고 작업을 걸었어요.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어요."라며 자신이 당한 부당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는 장 씨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호주에서는 손님들의 과한 요구는 매니저가 차단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네가 손님한테 잘해야지'라는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온다"면서 호주와 한국의 차이를 명확하게 들려주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낸 것일까?



시야를 조금 더 넓혀보자. '감정노동'은 단지 청소년(을 비롯한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안전보건공단의 추정에 따르면, 감정노동자 수는 전체 임금노동자 1,770만 명 중 560만~740만 명에 이른다. 대략 30~4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2013년 전국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과 노동환경연구소는 '감정노동종사자 건강실태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 역시 충격적이다. 전체 응답자의 30.6%가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고 했고, 여성 감정노동자의 48.9%가 '우울증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러한 실태조사는 또 있다. 2013년 당시 민주당 한명숙 의원은 카지노딜러, 철도 객실 승무원, 간호사, 콜센터 직원 등 감정노동 직군 2천259명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역시 결과는 매우 심각했다. 응답자의 30%가 고객 응대시 성희롱이나 신체접촉을 당했으며 81.1%가 욕설 등 폭언을 들었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실태조사들은 감정노동자들의 현실이 어떠한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전국민이 이용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마트와 홈플러스 등의 대형마트의 사정은 어떨까? 40대 이상의 여성인 대형마트 직원들은 상품 진열이나 시식 코너, 캐셔(계산원)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데, 이는 대표적인 '격한' 감정노동이다. 모든 고객에서 친절하게 응대해야 하고, 그들의 요구에 재깍 반응해야 한다. 그것도 항상 웃는 얼굴로 말이다. 고객의 말에 토를 달아선 안 되고, 그들을 조금이라도 불쾌하게 해선 안 된다. 고객의 잘못도 곧 직원들의 잘못이 된다. 고객은 완전무결한 존재다.


대형마트에 근무하는 50대 여성인 한 직원은 "30대 여성 고객이 가격표를 잘못 보고 물건을 골라 와서는 '왜 이렇게 비싸게 파느냐'고 항의를 하더니 '인상도 나쁘게 생겼다. 생긴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재수까지 없다'며 1시간 동안 욕설을 퍼붓고 소리를 지르다가 가버린 일도 있었다"며 모욕적 경험을 털어놓았다. 듣는 사람도 머리가 쭈뼛쭈뼛 설 정도로 화가 난다. 이러한 인격 모독 행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감정노동자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것이다.


또, 40대 후반의 한 직원은 "계산을 하지 않은 물건을 들고 나오는 고객에게 영수증을 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가 심한 폭언을 듣고 모욕감에 시달리다 결국 지난달 회사를 그만뒀다"면서 억울한 사연을 말했다. 비단 대형마트뿐일까? 백화점은 다를까? 쇼핑몰 텔레마케터는 어떨까? 패스트푸드 점은? 대기업의 서비스센터는 조금이나마 다를까? <동아일보>에서 정리한 사례들을 몇 가지 추려보았다. 한번 차근차근 읽어보도록 하자.



― 욕은 기본이고, 모멸감 느끼게 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한 번은 중년 남자가 이미 사용한 3만 원짜리 생활용품을 반품해 달라고 했다. 규정상 안 된다고 했더니 '못 배운 ×, 건방지게 나한테 안 된다고 해? 평생 거기 앉아 전화나 받아라'라고 하더라. 상담 창에 뜬 고객 정보를 보니 의사였다.(29·여·인터넷 쇼핑몰 텔레마케터)


― 하루 8시간씩 주유소에서 일한다. 주유를 할 때마다 손님에게 '주유 중 엔진 정지'를 알리는데 무시하는 손님이 많다. 고급 승용차를 탄 단골 손님에게 "시동을 꺼 달라"고 했는데, 손님이 갑자기 입에 담지도 못할 육두문자를 연발했다.(17·주유소 아르바이트생)


― 손님이 잘못할 때도 왜 내가 욕을 먹어야 하나. 가령 주소를 잘못 불러줬거나 주문을 잘못한 기록이 있는데도 "난 그런 적 없다"고 발뺌하는 손님이 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손님은 극소수다. 대부분 화부터 내고, 심지어 욕도 한다. 그래도 내가 사과를 해야 한다.(22·패스트푸드 배달원)


― 꼬투리 잡고 득 보려는 '블랙 컨슈머'가 많다. 블랙 컨슈머들은 말이 안 먹히면 상담원의 불친절을 이유로 정신적 손해배상을 요구한다. 정신적 피해가 도대체 어디까지냐. 규정도 없고 결국 고객 마음대로다.(30·여·인터넷 쇼핑몰 고객센터 직원)


― 교육을 받는 중에 고객에게 폭행을 당하면 어떻게 하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냥 맞으라고 했다. 맞고 나서 그 다음에 경찰에 신고를 하라 했다. 현장에서 싸우면 회사를 대표한 사람이 고객과 싸운 꼴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같은 직원들의 안전보다 회사 명예가 훨씬 중요한 것이다. 씁쓸하다.(42·대기업 서비스센터 기사)


― 가장 힘든 것은 계속 웃고만 있어야 하고 친절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도 일을 하다 보면 힘들 때가 많다. 하지만 웃지 않으면 고객들은 우리가 자신들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하고 불만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웃을 수밖에 없고 언제나 압박감을 느낀다.(43·대기업 서비스센터 기사)


대체 왜 이들은 이런 치욕스러운 경험을 해야 했을까? '이들'은 누군가의 아들 · 딸이며,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이다. 감정노동자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내가 곧 감정노동자이고, 나의 가족이 곧 감정노동자 아닌가? 여전히 '손님은 왕이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것인가? '남의 돈 벌기가 어디 쉬워?'라는 말로 이 악순환을 지속시킬 것인가? 불합리한 요구를 하고, 인격 모독을 가하는 것이 '소비자의 권리'란 말인가!



언가 잘못되기 시작한 건 '손님은 왕이다'라는 말이 절대적 명제로 자리잡기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손님은 왕이다, 고로 나는 왕이다.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인식이 뿌리내리기 시작하면서 소비자들은 점차 악마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영악한 소비자들은 SNS를 통한 컴플레인(complain)을 지능적으로 활용했고, 평가와 입소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서비스업체들은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기업들이 무조건적으로 소비자의 손을 들어주면서, 결국 모든 피해는 중간에 있는 감정노동자들에게 전가됐다. 결국 '나는 왕이다'라는 인식이 팽배하게 자리잡고 있는 이상 '감정노동'의 문제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과연 앞에 있는 알바가 당신들의 자녀이고 가족이라고 해도 이렇게 할까. '손님만 왕'인 문화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 존중해주는 문화가 정착되면 좋겠다"라는 류 씨(호프집 아르바이트생)의 호소 하나의 해답이 되진 않을까?



러한 인식의 전환과 함께 사회적인 대책과 방안도 함께 모색해야 한다. 우선, 노사 간의 합의를 통해 감정노동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사측은 소비자만 보호할 것이 아니라 감정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 또, 블랙 컨슈머(black consumer)를 비롯한 진상 손님'으로 빚어진 문제의 책임을 직원에게 전가해선 안 된다. 정부도 뒷짐만 지고 있을 일이 아니다. 앞장서서 감정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적 ·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힘써야 한다.


무엇보다 '감정노동'의 문제는 노동자와 소비자가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지 않는 이상 쉽사리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문제도 우리 안에 있고, 해답도 우리 안에 있는 셈이다. 우리 자신이 소비자임과 동시에 노동자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손님은 왕이다'가 아니라 '손님도 손님다워야 한다'는 명제가 우선이 되는 사회가 하루빨리 오기를 희망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