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조선 후기 실학자만큼만 하라

너의길을가라 2014. 4. 3. 07:45
반응형

 

서민들의 삶은 팍팍하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이토록 절실히 와닿을 수가 없다. 물론 재벌과 대기업도 앓는 소리를 한다. 기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규제를 풀어달라고 아우성이다. 이대로는 망한다고 빌빌댄다. 과연 그럴까? 연봉 5억원 이상 임원의 보수를 공개하도록 한 자본시장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지난 3월 31일 대기업 임원의 연봉이 공개됐다. 결과는 충분히 예상이 되었음에도 가히 충격적이었다.


- <경향신문>에서 발췌 -

 

기업들의 앓는 소리가 이해가 된다. 이처럼 (터무니없이) 많은 연봉을 기업의 오너를 비롯한 임원들에게 지급하고 있으니 경영이 어려운 것 아니겠는가? 도대체 이들이 이렇게 많은 연봉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문과 혈통 때문일까? 아니면 그로부터 비롯된 좋은 학벌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능력이 뛰어난 것일까?

 

노회찬 의원은 <SBS> 라디오 <한수진의 SBS 전망대>에서 "SK그룹 회장 같은 경우는 감옥에 1년 있으면서 301억을 받았으니까 공휴일을 빼면 하루 일당이 1억인 셈이다. 결국에 연봉 액수가 많아서 문제가 아니라 그 고액의 연봉이 어떻게 책정되었는지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고 비판했다. 다시 말해서 301억 원을 받은 최태원 회장이 경영에 있어 어떤 성과를 냈는지에 대한 분석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최태원 회장이 301억 원을 받을 만한 근거 말이다. 그의 '사람 값'이 평범한 사람의 수백 배에 달하는 이유 말이다!

 


- <경향신문>에서 발췌 -

 

또 다른 자료를 한 번 살펴보자. 입이 쩍 벌어지지 않나? (턱 빠진 사람은 없길..) 배당으로만 1078억 6400만 원을 번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경우에는 지난 2008년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특검을 받은 후에 등기이사를 사퇴했기 때문에 연봉이 공개되지 않았다. "(오너가) 이사를 사퇴해 버리면 그만이다. 돈 없는 사람은 사퇴 못 하고 돈 많은 사람만 사퇴하는 것 같다"는 비아냥이 쏟아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를 바라보는 서민의 심정은 어떠할까? 대기업의 임원들이 수 십 억의 연봉을 챙기는 동안 서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야말로 눈 앞이 깜깜한 지경이다. 세 모녀 자살 사건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그 이후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삶을 비관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 <오마이뉴스>에서 발췌 - 


이쯤되면 뭔가 대안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정부는 아무런 답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고작 규제를 완화해서 대기업에 힘을 실어겠다고 한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청와대의 눈치만 살필 뿐, 서민들을 위해 그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새정치민주연합은 나은 편이다. 지난 1일, 새정치민주연합은 '생활임금제 도입'을 지방선거 민생생활공약 1호로 제시했다. 시간당 5210원에 불과한 최저임금으로는 기본적인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활비(부천시 기준으로 6852원)'를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한국노총 황완성 부천지부 의장은 '생활임금제'에 대해 "빈부격차 증가, 실질임금 하락, 비정규직 확대의 문제를 해소하지 않고는 지역경제 활성화가 불가능하고 현재의 최저임금제도가 본래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판단 하에 지역의 저소득 노동자를 대신해서 생활임금 운동을 고민하게 된 것이다"고 설명했다. 수십 억의 연봉을 아무런 합리적인 근거도 없이 받아가는 대기업 임원들 이야기를 하다가 최저임금(5210원)과 생활임금(6852원) 이야기를 하니까 참 서글픈 생각이 든다.

 

최저임금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에 생활임금을 도입하자는 주장은 타당한 주장이다. 문제는 이것조차 가로막는 정부와 재계(財界)에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 정도의 '상상력'밖에 발휘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가령,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 사건이 터졌을 때도 사람들은 공분을 표했지만, 결국 노역장 유치에 따라 공제받는 벌금액의 한도를 1000분의 1로 만드는 데 그치지 않았던가? 이를 두고 법 집행의 공정성과 형평성을 강화했다고 자평할 수 있을까? 애초에 벌금제도의 불합리성에 착안해서 '일수벌금제'를 도입하는 쪽으로 나아갔다면 어땠을까? 논의가 훨씬 더 생산적으로 진행됐을 것이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 


결국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다. 협상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상대방은 1을 제시하는 데, 거기에 3을 요구하면 줄다리기 끝에 대략 2 언저리에서 타협이 이뤄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10을 요구했다면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3, 4, 5 중에서 타협점을 찾게 되지 않을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아니 오히려 서민들의 목을 조르는 정부와 새누리당에 비해 '생활임금제' 도입을 주장하는 새정치민주연합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5210원에서 6852원으로의 변화는 아무리 봐도 혁신적인 변화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상상력의 부족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진실로 현재의 적절하고 마땅한 점을 바탕으로 하여 옛 정전제도의 뜻을 살려 행한다면 할 수 있는 방법도 있으니 … 면적은 사방 100보를 1무로 하여 100무를 1경(약 40마지기)으로 하고, 4경을 1전(佃)으로 한다. 농부 한 사람이 1경의 토질르 받으며 법에 따라 조세를 내고, 4경마다 군인 1명을 내게 한다. 사(士)로서 처음 학교에 입학한 자는 2경의 토지를 받고, 내사에 들어간 자는 4경을 받되 병역의무는 면제한다. 현직관료는 9품에서 7품까지는 6경, 그리고 정2품의 12경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더 준다. 

 

- 유형원의 균전론 -

 

국가는 마땅히 한 집의 생활에 맞추어 재산을 계산해야 토지 몇 부(負)를 한 집의 영업전(永業田)으로 하여 당나라의 제도처럼 한다. 그러나 땅이 많은 자는 빼앗아 줄이지 않고 못 미치는 자도 더 주지 않으며, 돈이 있어 사고자 하는 자는 비록 천백 결이라도 허락해 준다. 영업전 이외에 땅이 많이 있으면서도 팔려고 하지 않으면 억지로 팔게 하지 않고, 땅이 영업전에 미치지 못해도 땅 살 능력이 없는 자에게 재촉하지 않는다. 오직 영업적 몇 부 안에서 사고 파는 것만을 철저히 살핀다. 

 

이익의 한전론 『곽우록』

 

이제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는 토지를 갖게 하고, 농사짓지 않는 사람에게는 토지를 갖지 못하게 하려면 여전제(閭田制)를 실시해야 한다. 여전법이란 무엇인가. 산과 강을 지세기준으로 구역을 확정하여 경계를 삼고, 그 경계선 안에 포괄되어 있는 지역을 1여로 한다. 여 셋을 합쳐서 리(里)라 하고 리 다섯을 합쳐서 방(坊)이라 하고 방 다섯을 합쳐서 읍(邑)이라 한다. 1여에는 여장을 두며 모릇 1여의 토지는 1여의 인민이 공동으로 경작하도록 하고, 내 땅 네 땅의 구별을 없이 하며 오직 여장의 명령에만 따른다. 여민들이 농경하는 경우 여장은 매일 개개인의 노동량을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가을이 되면 오곡의 수확물을 모두 여장의 집으로 가져온 다음 분배한다. 이때 국가에 바치는 세를 먼저 제하고 다음은 여장의 봉급을 제하며, 그 나머지를 가지고 일역부에 의거하여 노동량에 따라 여민에게 분배한다.

 

정약용의 여전론 『여우당전서』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 -


18세기 전반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자들을 소위 '경세치용 학파'라고 일컫는다. 이들은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개혁 방안을 연구했다. 그래서 나온 개혁안들은 지금 돌이켜봐도 놀랍기만 하다. 반계 유형원의 경우에는 '균전론'을 제시했다. 극단적으로 편향되어 있는 토지 소유 관계를 바로잡자는 것이었다. 물론 신분에 따른 차등 분배를 주장(농민 한 사람에게 1경의 땅을 분배, 유사와 관리에게는 2~12경의 토지를 분배)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혁신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호 이익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 역시 토지의 지나친 편중을 우려했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한 방안으로 '한전론'을 주장했다. 이는 개인의 토지 소유권을 허용하되 일정 토지(영업전)에 대한 처분 및 관리권을 국가에 귀속시킨다는 것이었다. 영업전에 해당하는 땅은 매매를 금지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농민이 살아가는 데 최소한의 토지를 유지시키자는 주장이다. 최소한의 삶을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기본소득제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다산 정약용의 경우에는 여전론과 정전론을 통해 '사회주의'식 주장을 펼쳤다. 토지의 공동 소유, 공동 경작 등 토지를 사회적 소유로 간주했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 발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볍게 살펴봤지만, 18세기와 19세기의 실학자들의 상상력이 지금의 우리들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세상을 바꾸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현 시점의 대한민국을 바라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상상력의 부족'이다. 물론 그만큼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에 지나치게 종속되어 있고, 그것은 상상하고 고민하기보다는 '닥치고 외우기'를 강요하는 교육이 만들어낸 병폐라는 것을 알고 있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지금 우리에게도 여러가지 대안적인 고민이 있다. 가령, '기본소득제'는 어떠한가? 혹은 자본주의를 넘어선 경제 체제는 어떠한가? 슬라보예 지젝의 공산주의는 어떠한가? 이처럼 우리는 얼마든지 다양하고 창조적인 생각들을 품을 수 있다. 그것을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는 또 다른 차원의 논쟁거리다. 문제는 이러한 상상력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짜고짜 돌을 던진다는 것이다. 정책 입안자들이나 정치인, 위정자들이 해야 할 고민까지 도맡아서 하고 나선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고 타박이다. 아예 입을 막아 버린다. 고작 '무상 버스'에도 바들바들 떠는 게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점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기득권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를 뒤집어 보고 싶다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거짓말 하지 마시라. 당신은 오히려 '지금'이 편한 것이다. 기득권을 향해 '비아냥'거리고, 한 바가지의 욕을 쏟아부으며 자조와 냉소로 하루를 보내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혹은 익숙해졌거나! 부디, 상상력을 발휘하자. 요구하자. 당신의 그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이 진심이라면 말이다. 부디, 조선 후기 실학자들만큼만 하자고 하면 너무 지나친 바람일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