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국민연금을 홍보하는 공익광고 포스터가 논란의 중심에 선 적이 있었다. 국민연금공단 공모전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이 작품은 "65세 때 어느 손잡이를 잡으시렵니까?"라는 문구와 함께 위 아래로 폐지를 실은 손수레와 여행용 캐리어가 그려져 있었다. 노후에 폐지를 줍는 빈곤층이 될 것인지, 여유를 만끽하며 여행을 다니는 중산층이 될 것인지 여부가 국민연금 가입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내용을 어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포스터는 국민 연금 자체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과 함께 노인 비하 논란에 휩싸였다. 포스터는 간단한 그림과 문구만으로 내용을 전달해야 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민연금공단의 포스터는 그런 부분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실패작인 셈이다. 세심한 배려가 부족했고,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최근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 보건복지부가 제작하고 온라인에 게재한 피임 홍보 포스터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번에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포스터에는 "다 맡기더라도 피임까진 맡기진 마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커플 한 쌍의 뒷모습이 담겨져 있다. 남성은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쇼핑백을 두 손에 짊어 지고, 어깨에는 여성의 숄더백을 어깨에 메고 있다. 측은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반면, 여성은 아무 것도 들지 않은 홀가분한 상태에서 뒤를 바라보면 미소를 짓고 있다.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이 포스터에는 남성과 여성 모두 불편한 반응을 보였다. 남성의 입장에서는 '남성이 여성의 봉(?)인가?'라는 생각이 들 법하다.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가장 꼴불견이라고 생각한다는 '백셔틀'까지 하고 있는 모습이 썩 유쾌하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피임의 관점에서 봤을 때, 남성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도 반가울 리 없다.
한편, 여성의 입장은 어떨까? 포스터에서 나타난 여성의 이미지는 '의존적'이고, '이기적'이다. 자신의 짐을 남성에게 모두 맡기고 있는 모습은 여성의 입장에서도 마뜩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남녀의 성 역할에 대한 '고전적' 은유라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많아지는 등 양성 평등을 지향하고 있는 사회적 흐름과 걸맞지 않다.
이는 포스터의 왼쪽 하단의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피임은 셀프입니다. 피임은 남자 혹은 여자만의 의무가 아닙니다. 함께 신경써야 할 소중한 약속입니다"라는 '바람직한' 문구를 무색하게 만든다. 보건복지부가 진심으로 피임이 남성 혹은 여성만의 의무가 아니라 함께 신경써야 할 소중한 약속이라고 생각했다면, 남녀가 각자의 짐을 나눠서 들고서 밝게 미소 짓는 앞모습을 담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보건복지부의 어처구니 없는 포스터에 대해 박봉정숙 여성민우회 상임대표는 "피임을 남녀 대립구도의 갈등 문제인 것처럼 선정적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 복지부가 남자에게 모든 것을 떠맡기는 여성의 이미지를 포스터로 보여주는 것 또한 여성혐오의 시선을 재생산하는 듯해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이런 수준의 포스터를 제작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SNS에 공개하는 보건복지부의 성의식(性意識)은 개탄스러운 지경이다. 비단 보건복지부만의 문제이겠는가? 얼마 전에 논란이 됐던 '성희롱엔 농담으로 대응하라'는 고용노동부의 괴상한 면접 요령은 공직 사회가 얼마나 왜곡된 성의식에 갇혀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성희롱엔 농담으로 대응? 고용부의 괴상한 면접 요령, 그게 현실)
대수롭지 않게 스쳐지나갈 수 있는 한 편의 포스터이지만, 곰곰히 따져보면(이번의 경우에는 대충 봐도 알 수 있는)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참 많이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금의 포스터를 삭제하고, 정말 제대로 된 피임 홍보 포스터를 다시 제작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는 '피임은 남자 혹은 여자만의 의무가 아닙니다. 함께 신경써야 할 소중한 약속'이라는 내용이 제대로 표현된 포스터가 많은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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