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서비스를 이렇게 하느냐"
지난 5일 0시 50분, 미국 뉴욕 JF케네디 국제공항에서 인천으로 출발하는 KE086편 항공기에서 벌어진 일은 황당하고도 충격적이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맏딸인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은 승무원의 서비스를 문제 삼으며, 활주로로 향하던 비행기를 갑자기 '램프리턴'시켰다. 항공기 정비 문제나 승객의 안전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하도록 되어 있는 '램프리턴'인 만큼 이번 사건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이었을까?
어떤 사정인지 들여다보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한 승무원이 퍼스트클래스에 탑승한 조 부사장에게 마카다미아넛(견과류의 일종)을 봉지째 건네며 "드시겠느냐"고 물었고, 그러자 조 부사장은 "무슨 서비스를 이렇게 하느냐(과자를 봉지째 주느냐. 규정이 뭐냐)"며 따지고 들었다. "규정대로 했다"는 승무원에 대답해 조 부사장은 "매뉴얼을 보여달라"고 소리쳤다.
상황을 파악한 승무원 사무장이 매뉴얼을 보여주기 위해 태블릿피시를 들고 나타났다. 긴장했던 탓인지, 놀랐던 탓인지 사무장이 태블릿피시의 암호를 풀지 못하고 버벅대자, 조 부사장은 사무장에게 비행기에서 내리라고 소리쳤다. 이것이 바로 '램프리턴'의 이유였다. 참으로 황당한 이유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승무원 기내 서비스 매뉴얼에 따르면, 승무원의 실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도대체 왜 그런 매뉴얼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째됐든 규정상으로는 승무원은 1차적으로 승객의 의향을 먼저 묻고 나서, 갤리(음식을 준비하는 곳)으로 돌아와 마카다미아넛을 종지(그릇)에 담아 제공하게 되어 있다. 사소한 것이지만, 부사장으로서 규정을 어긴 것이 불만스러웠다면 조용히 해결하거나 비행이 끝난 후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될 일이다. 승무원에게 고함을 쳐서 모욕감을 주거나 비행기를 회항할 일은 아니다.
이 때문에 비행기 출발 시각은 20여 분이 지연됐고, 인천 국제공항 게이트 도착까지는 11분이 딜레이 됐다. 또한, 객실 서비스와 승객 안전을 책임지는 승무원 사무장이 조 부사장 때문에 비행기에 없었다는 점도 아찔한 부분이었다. 승객 400여 명은 영문도 모른 채 시간을 잃고, 안전을 위협받아야 했다. 조 부사장은 이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벌써 잊힌 일이 되었지만, 잠시 시계를 2013년 4월 15일로 돌려보자. 당시 인천을 출발해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던 대한항공 비행기 안에서 벌어진 일은 우리 사회를 경악케 했다. 한 기업의 임원이 '라면이 덜 익었다', '너무 짜다' 등의 이유로 승무원에게 라면을 다시 끓여올 것을 요구했고, 급기야 승무원을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른바 '라면 상무' 사건이다.
당시 갑(甲)의 횡포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고 있는 상황에서 '라면 상무' 사건은 사회적 분노를 자아냈고, 국토부는 "지난 5년 동안 항공기 안 불법 행위가 지속적으로 증가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앞으로는 관용하지 않고 공항에 착륙하는 즉시 공항 경찰에 넘겨 처벌받도록 하겠다"며 강력히 조처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대한항공 관계자도 "항공기 운항을 위해 반드시 담보되어야 할 것이 안전이다. 항공기 안전 운항을 저해하는 기내 질서 위반행위를 막기 위해 강력한 대처를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나서 조현아 대한한공 부사장은 사내 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글을 게시했다.
"승무원 폭행사건 현장에 있었던 승무원이 겪었을 당혹감과 수치심이 얼마나 컸을지 안타깝다. 그러나 승무원들의 업무에 대한 사회적인 이해와 위로를 받았다. 승무원의 업무를 방해하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법률 조항도 이 기회를 통해 마련될 것이다. 앞으로도 항공기의 안전이나 운항을 저해하는 행위가 발생해도 규정과 절차에 따라 일관된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정당하게 인정받을 것이다."
'승무원들의 업무에 대한 사회적인 이해와 위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라면 상무' 이후로 기내 질서를 위반하는 사람을 강력하게 처벌 · 대처하도록 바뀐 기조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국토부 관계자는 조 부사장의 행동에 대해 "법에 저촉되는지 검토할 것이다. 초유의 사례라 관련 법 조항을 살펴봐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항공법
제50조(기장의 권한 등)
① 항공기의 비행 안전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사람(이하 "기장"이라 한다)은 그 항공기의 승무원을 지휘·감독한다.
항공보안법
제23조(승객의 협조의무)
① 항공기 내에 있는 승객은 항공기와 승객의 안전한 운항과 여행을 위하여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
1. 폭언, 고성방가 등 소란행위
2. 흡연(흡연구역에서의 흡연은 제외한다)
3. 술을 마시거나 약물을 복용하고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주는 행위
4. 다른 사람에게 성적(性的) 수치심을 일으키는 행위
5. 「항공법」 제61조의2를 위반하여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행위
6. 기장의 승낙 없이 조종실 출입을 기도하는 행위
7. 기장등의 업무를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방해하는 행위
우선, 항공법 제50조에 따라 항공기의 비행 안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기장)은 그 항공기의 승무원을 지휘 · 감독하게 되어 있다. 조 부사장은 행위는 월권에 해당한다. 아무리 '부사장'이라고 하더라도 비행기 내에서는 '승객'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 항공보안법 제23조에는 승객의 협조의무가 규정되어 있다. 제1호에는 폭언, 고성방가 등 소란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조 부사장의 고성이 이코노미석까지 들릴 정도였다고 하니, 이는 분명히 항공보안법 위반 여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헤럴드경제
조현아 부사장의 '행패'는 대한민국 사회의 씁쓸한 단면을 또 한번 부각시켰다. 재벌의 일가(一家)가 능력과 인성과 무관하게 '핏줄'만으로 기업을 운영하다보니, 온갖 문제가 불거지고 마치 왕조 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의 권력을 전횡하는 것 아니겠는가?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직원(승무원)의 인격적 모욕을 가하는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없이 마치 '어명(御命)'처럼 받들어지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중요한 승객의 안전과 편의는 깡그리 무시됐다.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기만 하다.
그런 회사 혹은 사회에서 "승무원의 잘못은 따로 내규에 따라 징계 여부를 검토하겠습니다. 하지만 승객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비행기를 돌릴 수는 없습니다. 부사장님도 비행기에 탑승한 이상 기장인 저의 승객입니다. 제 지시를 따라주십시오"라고 당당히 말하는 직업정신 투철한 기장이 존재하길 기대할 수 없다. 그랬다간 당장 비행기 운전대를 놓게 될 테니 말이다.
'라면 상무'는 회사에서 보직 해임이라는 징계를 받았다. 과연 조현아 부사장은 어떤 징계(?)를 받게 될까? 어떤 법적인 처벌을 받게 될까? 물론 큰 기대는 하지 말길 바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은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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