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국정 교과서냐, 검인정 교과서냐' 우린 제대로 고민하고 있는가?

너의길을가라 2015. 10. 8.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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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국정 교과서'를 지지하십니까, 아니면 '검정 교과서'를 지지하십니까?"


질문은 간단하다.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약자택일(兩者擇一). 질문만큼 답도 간단할까?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다양한 관점의 역사 교육이 장점인 검정 교과서'의 선호도는 43.1%, '일관된 역사 교육이 장점인 국정 교과서'의 선호도는 42.8%로 나타났다. 오차 범위 내의 차이인 만큼 어느 쪽이 우세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정도로 '국정'이냐, '검정'이냐를 두고 시민들도 첨예(尖銳)한 의견 대립을 보이고 있다.


이 구도의 이면을 살짝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국정 교과서'를 지지하는 여론의 실체는 '새누리당 지지층(국정 66.5%ㆍ검정 19.2%)'과 '보수층(국정 62.2%ㆍ검정 25.0%)'이고, '검정 교과서'를 지지하는 여론을 구성하고 있는 집단은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층(22.1% ㆍ69.5%)'과 '진보층(17.4%ㆍ68.0%)'이라는 사실 말이다. 




"우리 대한민국 정통성을 격하하고 오히려 북한을 옹호하는 역사 서술이 만연한 상황에서 학생들은 어떤 교과서를 선택해도 국민 정체성과 긍정적 역사를 배울 수 없는 구조이다. 이런 것을 막고자 하는 게 국론 통일을 위한 국민 통합 역사교과서를 만들자는 취지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강행한다면 유신독재의 향수를 느끼는 유신 잠재 세력으로 규정짓고 저지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음을 경고한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국민의 역사의식을 길들이고 통제하겠다는 독재적 발상을 그만두라. 감추고 미화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배우고 공부할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 이미 그 '실체'를 잃어버리고, 정치권이 주도하고 있는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된 것은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역사관'을 자극하면서 흩어졌던 지지층을 다시 결집시키고자 하는 새까만 속셈은 여당과 야당이 공통으로 품고 있는 생각인 듯 하다.


내년에 치러질 총선을 앞두고 정부와 여당이 지지층을 단결시키는 '촉매제'로 국정 교과서를 꺼내들었다는 분석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고,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중진 의원은 "교과서 문제는 우리에게도 질 수 없는 싸움이다. 우리의 지지층을 결집시켜 박근혜 정부의 극우적 성향에 대한 대국민 홍보에 나설 필요가 있다. 내년 선거도 앞두고 있는 만큼 교과서 문제를 시작으로 여론을 확산시켜 갈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진영논리(陣營論理). 혹시 (너무도 명쾌한 대답을 하고 있는) 다수의 시민들이 여기에 휘둘리고 있는 건 아닐까? 지독한 함정에 빠져버린 것은 아닐까? '국정 교과서'와 '검정 교과서'가 각각 함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 지지하는 정당에 따라 혹은 반대하는 정당에 반대하기 위해 너무 쉬운 선택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국정 교과서란 '국가(國家)'가 주체가 돼 만들어 내는 교과서를 의미한다. 아니,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정권(政權)'가 주체가 되는 것이다. 8일 교육부는 중ㆍ고 한국사 교과서가 국정으로 전환되면 국사편찬위원회에 집필을 위탁하겠다고 밝혔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정부에서 임명하는 만큼 국가(정권)가 '주체'가 된다는 점은 다를 바 없다. 


이 경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정권'은 선거를 통해 5년 단위로 바뀔 수 있다. 그렇다면 국정 교과서의 집필 방향은 정권의 성격에 따라 왔다갔다 할 수밖에 없다. 이는 역사 교육에 있어 혼선을 야기할 것이고, 학생들은 혼란에 빠지게 마련이다. 정권에 따라 뒤바뀌는 교과서? 도대체 이런 에너지 낭비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 한겨레


반면, 현행 체제인 검인정 교과서는 민간 출판사가 집필하고, 국가의 검정ㆍ심의를 통과하여 발행된 교과서를 뜻한다. 하나의 생각이 아니라 다양한 생각이 공존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리인 것처럼, 다양한 역사관이 존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다른 시선으로 혹은 다른 각도에서 역사를 관찰하고, 이를 통해 더욱 풍성한 역사를 발굴해내는 것은 후세(後世)의 몫이자 역할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검인정 교과서는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방지원 신라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국정제를 근간으로 교과서를 발행하는 나라는 북한, 방글라데시, 일부 이슬람 국가 정도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연히 OECD 회원국 가운데 국정교과서를 발행하는 국가는 한 곳도 없다. 우리도 과거에 이런 시도를 한 적이 있다. 바로 유신을 선포했던 박정희 정권과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의해서였다.


1974년. 박정희 정권은 11종의 중·고교 국사 교과서를 각 1종으로 통일시켜 버렸다. 표면적으로 내건 이유는 "민족사관의 통일"을 통해 "민족중흥의 의욕에 충만한 후세 국민"을 기른다는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유신의 정당화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화(美化)가 자리잡고 있었다. 당연히 '5·16 군사 쿠데타'는 '5·16 혁명'으로 씌어졌다. 


1982년. 전두환 정권은 국정교과서에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적 징후"로 인해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10·26 사태를 맞았다"는 합리화(이처럼 정권의 필요가 정권의 성격을 뛰어넘기도 한다)를 바탕으로 정권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로 일관했다. "제5공화국은 정의 사회를 구현"하고 "국민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민주 복지 국가 건설을 지향"한다나? 아무리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해도 이 대목에선 콧방귀가 뀌어진다.


ⓒ 한겨레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가 검인정제를 채택하고 있다. 역사관을 '정권에 입맛에 따라' 좌지우지하고, 그마저도 하나로 통일시키려는 시도(국정제)는 뒤가 구린 구석이 있는 정권에서나 시도할 법한 '짓'이다. 가령, 북한 같은 나라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정부도 혹시 그런 것은 아닐까?'라는 지극히 합리적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독립운동을 평가절하하고,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부(國父)로 받드는 흐름, 반공을 앞세워 '친일의 정당화'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관이 현 정권에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그뿐일까?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숙원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에 대한 명예회복(회복이라는 표현보다는 미화가 적절하지만)'을 위해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지금의 검인정 교과서 체제라면 '교학사 교과서'와 같이 친일적 색채가 짙은 교과서를 걸러낼 수 있다. 취사선택을 통해 배제하는 방법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민족적 색채가 지나치게 강한 교과서도 걸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보수 진영의 전가의 보도인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논리와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국정 교과서 체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정권에 입맛에 따라 만들어진 교과서를 학교에선 무조건 선택할 수밖에 없다. 획일화된 역사관에 의해 길들여지는 아이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9월 2일 서울대 역사 관련 5개 학과 교수 34명과 전국의 역사 교사 2255명이 낸 성명을 시작으로 박근혜 정부의 국정화 드라이브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물론 한국사립초중고등학교법인협의회와 같이 국정 전환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교육부는 여전히 검토 중이라는 입장이지만, 현재의 분위기는 국정화로 많이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결국 국정화는 현실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중차대한 문제가 '정치권'에 의해 진영 간의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됐다는 점이다.


깊은 고민과 진지한 논쟁이 필요한 일, 주어진 선택지가 함의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꼼꼼하게 따져보고 '결정'해야 할 문제가 너무 쉬운 답변을 강요하는 초라한 시험이 되어버렸다. '국정 교과서냐, 검정 교과서냐', 이 선택은 결코 지지하는 정치 세력에 의해 결정될 문제가 아니다. 이는 우리 민족(이라는 단위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의 '역사'가 달린 문제이자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달린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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