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영화의 화두는 '기억'인 듯 하다. "잊지 말자"는 다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소수의견>은 용산 참사의 그들이 겪었을 아픔과 고통을 이야기 했고, <연평해전>은 제2연평해전 당시 끔찍한 사투를 벌였던 참수리 357호의 젊은이들을 기억하라고 고함쳤다. 그리고 최동훈 감독의 <암살>은 우리의 시선을 일제 강점기로 이끈다. 거기엔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쳤던, 이름 없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있다.
1920년 의열단의 박재혁 의사는 상해에서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잠입했다.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암살하고 붙잡혀 순국한 후 그의 편지 한 통이 뒤늦게 의열단 단장 김원봉에게 전달된다. 아래와 같다. '어제 나가사키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형편이 뜻대로 되어가니 이 모든 것이 그대가 염려해 준 덕분인 듯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즐겁습니다. 그대의 얼굴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꿈을 위해 싸우다 죽은 레지스탕스의 짧은 편지다. 이처럼 담대하고 차분한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가늠하기 힘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운명처럼 그 시대에 맞서 싸웠고 버텼다. 어떤 이는 이름을 남겼지만 어떤 이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고 하물며 삶의 이야기도 남기지 않았다. 그 남겨지지 않은 이야기로부터 이 영화는 출발한다. (최동훈 감독)
<소수의견>의 기억이 다소 투박한 느낌이었다면, <연평해전>의 그것은 촌스럽다는 인상이 강했다. 반면, 대한민국 최고의 상업영화 감독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최동훈 감독은 자신이 불러내고 싶은 기억을 매우 세련되게 끄집어냈다. 거기엔 그 시대 독립운동가들의 낭만적인 정서가 배어 있는 레지스탕스 정신과 죽음을 불사하는 초연함이 한몫했다. 최동훈 감독의 제작노트 속에 담겨 있는 박재혁 의사의 편지는 그것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무엇보다 연출을 맡은 감독의 역량 차이는 결정적이었다. <아나키스트> 23만 명, <라듸오 데이즈> 21만 명, <모던 보이> 76만 명 등에서 증명되듯 '1920~40년대 경성, 즉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망한다'는 충무로의 속설은 정설에 가까웠다. 최근에 개봉한 <경성학교> 역시 35만 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타고난 이야기꾼 최동훈 감독은 이 속설마저도 한방에 날려버리고 있다. 그만큼 영화는 재미있고 완성도도 뛰어나다.
최동훈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암살>에도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중 생활을 하는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 염석진(이정재)을 필두로 조선주둔군 사령관 카와구치 마모루와 대표적인 친일파 강인국(이경영)을 암살하기 위해 소집된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속사포(조진웅), 폭탄 전문가 황덕삼(최덕문)이 주요 인물이다. 여기에 300불이면 누구라도 죽이는 살인청부업자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와 그를 돕는 영감(오달수)이 얽히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초호화 캐스팅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특별출연에 나선 조승우와 김해숙도 영화의 재미를 한층 더한다. 조승우는 우수에 찬 약산 김원봉을 연기하면서 초반부를 휘어잡는다. 아네모네 마닥 역을 맡은 김해숙도 깊은 내공을 선보인다. '캐릭터의 향연'이라 할만큼 <암살> 속의 캐릭터들은 각각의 장면들 속에서 빛이 난다. <도둑들>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최동훈 감독은 다양한 캐릭터들을 넘치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조절하면서 앙상블을 이루게 만들었다.
다시 '기억'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암살>에서 '잊지 말자'는 다짐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던 그 순간, 김구 선생과 김원봉이 나누던 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김원봉과 김구 선생은 '(마냥 기뻐하기에는) 너무 많이 죽었다'면서 '미안하다', '내가 더 미안하다'며 아픔을 위로한다. '사람들에게 잊혀지겠죠?'라는 김원봉의 씁쓸한 대사는 관객들을 향한다. 그리고 그 물음은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는 가슴 시린 고백이 되어 가슴에 꽂힌다.
두 번째 '잊지 말자'는 다짐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의 의도적인 방해와 경찰의 습격으로 친일파 처단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던 것처럼, 친일 행적을 한 염석진에 대한 단죄도 실패하고 만다. 오히려 그의 뻔뻔한 일장연설에 법정 안에 있던 다수의 사람들은 설득을 당하기까지 한다. 국가도 하지 못한, 법으로도 해내지 못한 염석진에 대한 처단은 16년 전의 임무를 잊지 않고 기억했던 염석진의 부하 명우에 의해 이뤄진다.
올해 우리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했다. 과연 우리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잊지 않고' 있는 것일까?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들의 후손들은 이 땅에서 자긍심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힘겨운 나날들을 이어가고 있다. 반면, 친일파들은 어떠한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누구보다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지 않은가? 과연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지 않고' 살아왔던 것일까?
영화 곳곳에 복선과 암시가 깔려 있고(두 번 봐도 괜찮다는 이야기), 관객들을 놀라게 하는(그렇다고 뒤집어질 정도는 아니다) 반전도 숨겨져 있지만, 무엇보다 <암살>의 가장 커다란 반전은 '그들을 잊었던 우리들'을 발견하게 되는 그 순간이 아닐까 싶다. 기억의 힘은 그 무엇보다 강하다. 마찬가지로 기억하는 우리들의 힘도 그 누구보다 강하다. 이제 다시 시작하자.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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