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악역(惡役)을 맡아서는 안 되는 배우가 몇 명 있다.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다. 정말 소름돋게 연기를 잘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악인으로 분(扮)하면 시청자들의 '분노 게이지'가 다른 경우보다 몇 배는 뛴다. 쉼없이 짜증이 유발되고, 견디기 힘든 역정이 솟구친다. 그것이 연기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지만 소용없다. 게다가 그들의 평소 모습과도 전혀 다른 캐릭터인데도 이질감이 느껴지기는커녕 몰입도만 높아진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힘든 일을 천연덕스럽게 해내는 천상 배우들의 이름은 바로 김의성과 문성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분노 게이지를 끌어올리는 열연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김의성은 tvN <미스터 션샤인>에서 친일파 이완익을 연기하고 있고, 문성근은 JTBC <라이프>에서 부병원장 김태상 역으로 시청자들을 만나고 있다. 두 배우의 활약 덕분에 드라마의 완성도가 한층 업그레이드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에서 악역의 중요성은 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갈등을 만드는 동시에 균형을 잡는 게 악역이다. 악역의 무게감이 떨어지면 당연히 극의 긴장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악역이 단면적인 성격을 지닌 일차원적인 캐릭터라면 이야기의 얽개는 얄팍해지고 우스꽝스러워진다. 흔히 막장 드라마들에 나오는 악역 캐릭터들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악역에게도 그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어야 하고, 캐릭터에 대한 이해와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한 부분을 설득력있게 표현하는 건 결국 배우의 역량이다. 단순히 화를 내고 언성을 높인다고 악역이 완성되는 건 아니다. 감정의 섬세한 묘사도 필요하고, 그가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당위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다. 연기를 못하는 배우가 악역을 맡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물론 너무 잘하는 배우가 맡아도 살짝 곤란(?)하다.
"이래서 니는 멀었다는기야. 배워두라. 원래 그런 아새끼들이 제일 잘 짓는 개가 되는 법이지. 지가 협박을 하면, 나는 뭐 노네? 지놈은 자식이 없는가말이."
<미스터 션샤인>에서 김의성은 독보적인 악역이다. 사실 '친일파'라는 설정은 그 어떤 설명도 필요치 않을 악역이 아닌가. 그는 의병이라 불리는 민족주의 투사들과 비교되며 더욱 쓰레기 같은 인물로 이해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완익은 자칫 뻔하디 뻔한 인물이 될 뻔했지만, 김의성의 완급을 조절한 연기한 덕분에 굉장히 탄력적인 캐릭터가 됐다. 그가 등장할 때마다 드라마는 묘한 긴장감이 넘쳐 흐른다.
이완익이 누구인가.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조선을 갖다바치겠다 고개 숙이고, 외부대신 자리에 앉기 위해 전임자를 계속해서 암살하는 천인공노할 자다. 그뿐인가. 하나뿐인 딸 쿠도 히나(김민정)의 약점을 잡고 끊임없이 이용하려 든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재가(再嫁)를 보내려는 철저한 악인이다. 드라마를 보고있노라면 정말이지 화가 끓어오르는 감정을 여러차례 느끼게 된다.
그의 악역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부산행(2016)>에서 '나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자 용석 역을 맡아 '국민 악역 배우'로 등극한 이래 김의성은 국민들의 혈압지수를 끌어올린 장본인이 됐다. MBC <W>(2016)에서는 웹툰 작가 오성무와 진범 한상훈을 오가며 1인 2역을 소화했는데, 정말이지 살벌하고 소름돋는 연기였다. <더 킹>(2017)>에서 보여준 냉혹한 들개파 보스 김응수 역도 강렬하고 인상적이었다.
"너 지금 뭐라 그랬니? 노력이라고? 상국대학병원에서 30년동안 하루같이 어떻게 살아왔는데. 남의 등이나 쳐서 타이틀 따고 들어앉아버린 네가 이제 와서 나를 평가하고 비난해?"
한편, <라이프>에서 문성근이 맡은 김태상은 굉장히 세속적인 인물이다. 실력 면에서는 나무랄 데 없는 최고의 정형외과 의사이지만, 도덕성이라든지 윤리의식은 그다지 또렷하지 않다. 권력을 지향하는 탐욕스러움을 지니고 있다. 후배 의사들을 철저히 하대(下待)하고, 자신의 성공을 위한 부속품처럼 여긴다. 지금은 폐지된 압존법을 쓰지 않았다고 무차별한 폭력을 행사하는 저 참담한 모습을 보라!
자신의 성과를 위해 환자들을 과잉 진료해 불필요한 인공관절 수술을 받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면허도 없는 인공관절 수술기기 납품업체 영원사원에게 환자의 수술을 맡기는 등 의료법을 위반하기도 했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김태상은 예형우를 비난하며 길길이 날뛰기 시작한다. 문성근은 막다른 길에 몰린 자의 발악을 사실감 있게 그려냈고, 그 장면은 최고의 명장면이라 할 정도로 몰입도가 있었다.
문성근은 이미 수많은 작품에서 악역을 연기한 적이 있다. <한반도>(2006)에서는 친일파 총리였고, <실종>(2009)에서는 살인마였다. <남영동 1985>에서는 고문과 조작 수사에 관여하는 대공 치안본부 소속의 '윤 사장'으로 등장했다. 그런가 하면 SBS <조작>에서는 진실 은폐에 적극 가담한 대한일보 구태원 상무 역을 맡았다. 그는 안정적인 연기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넣어 결코 간단치 않은 악역을 완성해 왔다.
연기의 절대 고수이자 '국민 악역 배우'라고 불러도 무방할 두 명의 배우, <미스터 션샤인>의 김의성과 <라이프>의 문성근이 앞으로 극 속에서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이 등장하면 분노 게이지가 높아지면서도 그들의 등장을 학수고대하게 되는 건 왜일까. 우스갯소리지만, 앞으로는 김의성과 문성근이 가급적 악역을 그만 맡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너무 잘해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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