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해어화>, 누가 뭐래도 한효주의 영화

너의길을가라 2016. 4. 20.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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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드라마 

국가 : 대한민국 

감독 : 박흥식

제작/배급 : 더 램프㈜/롯데 엔터테인먼트

런닝타임 : 120분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줄거리 : 마지막 남은 경성 제일의 기생 학교 '대성권번'. 빼어난 미모와 탁월한 창법으로 최고의 예인으로 불리는 소율(한효주)과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연희(천우희)는 선생 산월(장영남)의 총애와 동기들의 부러움을 받는 둘도 없는 친구.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윤우(유연석)는 민중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조선의 마음'이라는 노래를 작곡하려 하고 윤우의 노래를 부르고 싶은 소율은 예인이 아닌 가수를 꿈꾸게 된다. 하지만 윤우는 우연히 듣게 된 연희의 목소리에 점차 빠져들고 소율과 연희는 노래 '조선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엇갈린 선택을 하게 되는데…



"<해어화>에 대한 마음이 유독 더 한 것 같아요. 자꾸 뭔가 눈이 간다고 해야 할까요. 정말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20대를 마무리 하면서 촬영한, 20대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영화라서 의미를 더하기도 해요. 요즘은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가 많이 없고 다양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투자가 잘 되지 않는 것이 제일 큰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좋은 시나리오가 있어도 여자가 주인공이면 투자 받기가 힘든 것이 아무래도 있더라고요. 새로운 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최근 한국적인 장르를 가진 영화들이 편중되기 인기를 얻다 보니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비슷하지 않나 싶기도 했어요. 상업 영화라도 다양성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효주)


'여배우를 위한 시나리오가 없다'는 말은 충무로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른바 '남성 영화'가 주축을 이루는 가운데 여배우는 극의 진행을 돕는 '소품' 정도로 소비되곤 한다. 그만큼 다양성은 상실되고, 천편일률적인 영화들이 '복제'되어 나돈다. 천만 영화가 뜨문뜨문 나오긴 하지만, 한국 영화 전체로 봐선 장려한 만한 상황은 아니다. 


영화는 이미 '산업'이고, '돈벌이'가 되지 않으면 제작이 안 된다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에 착안해서 본다면 결국 '시나리오를 소화할 만한 여배우가 없다'는 반론도 제기될 법 하다. 사실 한 편의 영화를 이끌어나갈 '역량'을 갖춘 여배우를 떠올리는 것이 쉽지 않다. 김혜수, 전도연, 손예진 정도일까. 그 외에도 몇 명의 여배우를 더 추가할 순 있겠지만, 연기력과 티켓 파워를 동시에 갖춘 여배우를 채워넣기가 만만하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탈자>의 임수정, <날, 보러와요>의 강예원, <해어화>의 한효주와 천우희 등 여배우의 비중이 높은 영화들이 잇따라 관객들을 만나고 있는 상황은 매우 반갑다. 사실상 남배우들로만 꾸려졌던 최근 충무로의 흐름에 이른바 '여풍(女風)'이 불고 있는 셈인데, 앞으로 개봉할 예정인 <가족계획>의 김혜수, <덕혜옹주>의 손예진의 활약도 기대가 된다. 


'여배우'가 자주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고무적인 일이지만, 꼼꼼하게 따져보면 실상은 겉과 다르다. 1인 2역을 소화했던 임수정과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강예원이지만, 영화 속에서 두 배우가 극을 이끌어가는 '주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단순히 '비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시선'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해어화>는 한효주가 절반 이상을 거뜬히 차지하는 영화다. 누가 뭐래도 이 영화는 한효주의 영화이다. <해어화>는 소율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해서 소율의 모습으로 끝이 나는데, 철저히 '소율'의 시선을 따라간다. 정가(正歌)의 명인이자 마지막 기생인 정소율 역을 맡은 한효주는 소녀 같은 순수함에서부터 욕망과 질투에 물든 도발적인 모습, 그리고 처절함과 공허함을 담아내기까지 실로 다채로운 연기를 선보인다.


1943년이라는 비운의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세 남녀가 만들어가는 '파국'은 생각보다 강렬하고 또한 애절하다. 둘도 없는 친구였던 소율과 연희가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윤우의 '뮤즈', 즉 '조선의 마음'이 되기 위해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은 저릿하게 다가온다. 사랑하는 남자인 윤우(유연석)가 자신이 아닌 연희(천우희)를 '뮤즈'로 삼는 것까지 참아냈던 소율은 두 사람의 '배신'에 끝내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복수와 파멸의 길을 선택한다. 




소율의 시선을 따라가는 <해어화>는 이 치정극을 제법 설득력 있게 들려주는 데 성공한다. 물론 그 공은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들을 대담하고도 예민하게 표현해낸 한효주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감정의 강약조절과 발성은 발군이고, 캐릭터를 이해하고 표현해내는 능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장면마다 드러나는 집중력과 몰입도도 놀라울 정도다. 


또, 연기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한효주는 몇 달 간의 연습을 통해 정가 실력을 가다듬었고, 청아한 목소리에 가창 능력이 더해지면서 연기는 사실감이 배가(倍加)됐다. 무엇보다 한 편의 영화를 '이끌어' 나가는 '힘'이 참 단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십대 후반(촬영 당시)의 나이에 그 무게를 견디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그는 흔들림 없이 영화 전체를 감당해낸다. 




다만, 시나리오에 있어 아쉬운 부분이 눈에 띠는 건 사실이다. '뮤즈'와 사랑에 빠지는 건 예술계에선 늘상 있어 왔던 일이기에 그 자체가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율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두 사람의 '예의 없음'은 다소 과한 설정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모든 것이 소율의 상황을 절벽으로 몰아넣어 복수를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들이었겠지만, 약간 무리수가 아니었나 싶다. 


소율의 시선에 의존하다보니 윤우(유연석)와 연희(천우희), 두 캐릭터는 탄력을 받기보다 소모된다는 인상을 받는다. 천우희는 기존의 어두운 이미지에서 변신을 꾀했고, 낭랑한 목소리와 흡입력 있는 연기를 통해 '연희'라는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지만, 애초에 평면적으로 설정된 틀(친구를 배신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클래식한 여성 캐릭터)을 깨는 데 실패한다. 지인의 표현을 고스란히 인용하자면, 그저 '나쁜 년'에 머물고 만다. 한결 편안한 연기를 선보이는 유연석도 '나쁜 놈'으로 소모될 뿐이다. 


또,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예인(藝人)'보다는 (이난영과 같은) 가수가 인정받고, 정가보다는 (목포의 눈물 같은) 가요가 대중의 사랑과 지지를 받게 되면서 소율과 연희도 '예인'으로서의 길을 '손쉽게' 버리게 되는데 그 부분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 자체의 설득력은 충분히 제시됐다. 오히려 둘도 없는 친구였던 소율과 연희가 고작 '남자' 때문에 반목하고 갈라서는 대목은 드라마적으로는 매력적일지 모르지만, 여성에 대한 시선에서 보자면 '후진 것'이었다.



"완벽하게 만족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은 작품이었고, 여러모로 느끼는 것도 많았습니다. 그냥 왠지 <해어화>는 더 부담이 되고 책임감도 많이 느끼는 기분이었습니다. 소율이를 이해하기 위해 정말 무던히 노력했어요. 먼저 소율이의 첫 얼굴은 순수하게 그리고 싶었습니다. 소녀도 아닌 여자도 아닌 그 어디 쯤에 있는 순수하고 아직은 미성숙한 모습을요. 만약에 소율이가 성숙했더라면 사건에 있어서 의연하게 대처했겠죠. (웃음) 소율이는 너무나도 순수한 존재였고 솔직했기에 그런 변화가 온 것이 아니었을까요." (한효주)


<해어화>는 한효주의 눈빛과 표정들에 담겨 있는 다양하고 깊이 있는 연기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영화다. 소녀 같은 감성을 지니고 있던 소율에서부터 열등감과 열패감을 느끼는 '살리에르'가 되고, 이내 상처받아 처절히 찢긴 여인이 되어 파멸의 치정극을 완성하는 소율을 완벽하게 묘사한 배우 한효주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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