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화가>는 기대가 컸던 작품이었다. 여자는 판소리를 하는 것이 금기(禁忌)였던 시대에 여류 소리꾼의 꿈을 품었던 진채선(수지)과 그를 소리꾼으로 키워냄으로써 또 한번 금기를 깨뜨렸던 스승 동리 신재효(류승룡)라는 인물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었다. 금기를 무너뜨리는 파격, 그 도발적인 시놉시스는 <도리화가>에 대한 '환상'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는 영화에 대한 평은 '실망스럽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을 드러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반면, 수지에 대한 평가는 '호평'이 많았다. '수지의, 수지를 위한, 수지에 의한 영화'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관객'들의 반응이었다. 그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아쉽다'는 의견이 좀더 많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만약 수지가 아니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영화 <도리화가>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랬다면 '수지'이기에 가능한, 그를 앞세운 압도적인 마케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언론을 뒤덮고 있는 '수지'와 관련된 기사들을 보라. <도리화가>가 '수지'에게 빚을 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진채선'보다 '수지'가 도드라지는 건 엄청난 마이너스다.
그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예쁨'을 포기하지 못해 '작품'을 망치고 마는, 여배우들이 흔히 범하고 마는 결정적인 실책을 수지는 답습하지 않았다. 민낯은 물론 '검은 때'로 가득한 꾀죄죄한 모습도 불사했고, 얼굴의 '뾰루지'도 숨기지 않았다.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밧줄로 몸을 묶고, 득음을 위해 악을 쓰며 소리를 지는 모습은 그가 '외모'보다는 '진채선'이라는 인물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력'은 관객을 설득시키기에 충분했지만, '능력'은 관객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판소리가 남자만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였다. 여자가 소리를 낸다? 그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스승인 신재효조차 "여자는 뱃심이 부족해서 안 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자연스레 진채선의 꿈을 무시한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어떠했겠는가? 멸시와 조롱, 비웃음으로 가득차 있지 않았겠는가?
그런 비좁디 비좁은 틈, 어쩌면 실낱 같은 빛조차 보이지 않았던 시대를 뚫어냈던 진채선이다. 이쯤되면 관객에겐 '기대'가 생긴다. 시대의 고정관념을 깨뜨린 여류 소리꾼 진채선의 '소리'에 대한 궁금증 말이다. 이제 전선(戰線)은 뚜렷하게 형성된 셈이다. <도리화가> 혹은 수지와 관객들 간의 팽팽한 줄다리기. "어떤 소리를 들려줄 거니?"
"배운 기간으로 따지면 1년 정도 된다. 스케줄도 있고 해서 선생님을 만나 배우고 나면 그걸 녹음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매일매일 들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그의 노력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진채선 역을 소화하기 위해 수지는 1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판소리를 배워가며 준비를 했다고 한다. 애쓰고 고민했던 덕분일까? 영화 속에서 수지는 그럭저럭 준수하게 소리를 뽑아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시대를 뛰어넘었던 진채선을 표현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감독도 이 부분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너름새(연기)'와 '감정'에 포커스를 맞추지만, 그 기본을 이루는 소리'의 부족을 어찌할 것인가. 수지의 목소리에는 대부분 현악 OST가 배경으로 깔린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신재효가 어린 진채선에게 남긴 말이자 관객들에게 전하는 "마음껏 울거라, 울다가 보면 웃게 될 것이야"라는 말은 공허하기만 하다. '소리'만으로 관객을 울리고 웃겨야 하지만, 정작 <도리화가>에 '소리'는 없다. 판소리의 클라이막스에선 아예 '소리'는 제거되고 '음악'만 남는다. 대원군 앞에서 "그 아이의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옵니다"라는 신재효의 자랑은 '헛웃음'을 자아낸다.
영화는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스승 신재효와 제자 진채선의 '멜로'로 급격히 전환한다. 두 사람의 멜로에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판소리 6대목에 포함되는 '심청가'와 '춘향가'가 <도리화가>를 관통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건 도입부에서부터 확인된다. 진채선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이도 됐다가, 마음에 품은 이몽룡을 위해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는 춘향이가 되기도 한다. '아버지'와 '이몽룡' 두 인물이 바로 신재효라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더 아쉬운 것은 '해석'이다. 진채선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시대의 금기를 깨뜨렸던 도발적인 인물이 아닌가? 그런 근대적인 인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 끌어들인 틀이 지나치게 낡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스승)를 위한 희생', '님을 향한 일편단심'과 같은 전근대적인 수동성에 초점이 맞춰진 심청이와 춘향이를 '진채선'을 통해 반복해서 보는 것은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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