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흥미로운 심리 스릴러<해빙>, 신선하거나 낯설거나

너의길을가라 2017. 3. 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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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디 찼던 그리고 길고 길었던 겨울이 지났다. 얼음이 녹기 시작한다. 해빙(解氷)이다. 꿈틀꿈틀, 무언가 시작될 조짐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얼음을 딛고 서 있던 사람에게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아, 언제 바다 밑으로 빠질지 모른다.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이 초조하기만 하다. 한편, 얼음 아래 갇혀 있던 '비밀'에게는 스스로를 드러낼 적기(適期)다. 혹은 그 비밀이 떠오르기를 고대하고 있던 사람에게도, 해빙은 반가운 순간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강이 녹자 머리 없는 여자의 시체가 떠오른다. 얼음이 녹듯, 그리하여 무언가가 시작되듯,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된다. 


승훈(조진웅)은 자신이 운영하던 병원이 도산한 후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수정(윤세아)과 이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미제 연쇄살인 사건으로 유명했던 경기도 북부의 한 신도시(극 중의 '화정신도시'는 '화성시'을 연상케 한다.)로 옮겨가 선배의 병원에 월급쟁이 의사로 취직하게 된다. 또, 정육식당을 운영하는 성근(김대명)의 건물 3층에 세를 들어 살아간다. "이런 데서 (아들을 데리고) 살 생각이야?"라고 따져 묻는 수정의 대사처럼, 허름한 건물의 원룸이다. 승훈은 짐조차 풀지 않고 지낸다. 어차피 몇 개월밖에 되지 않는 계약 기간, 다시 또 어디론가 옮겨야 할지 모른다. 피곤에 절어 퇴근을 하면 곧바로 퍼져 잠이 든다. 그러나 안식은 없다. 



"팔다리는 한남대교에, 몸통은 동호대교에… 이렇게 따로 버려야 내년 4월까지는 떠오르지 않을 거야."


성근의 아버지, 치매 노인(신구)가 수면 내시경 도중 내뱉은 의문스러운 말은 승훈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이것은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 고백'인가, 아니면 치매 노인의 단순한 '헛소리'인가. 평소 추리 소설을 즐겨 읽었기 때문일까. 그때부터 모든 것이 의심스럽기 시작한다. 한강에 떠오른 시체, 15년 전에 발생한 살인 사건, 치매 노인의 괴상한 말.. 승훈의 혼란은 점점 가중된다. 그 와중에 들려오는 소문들은 또 어떠한가. 치매 노인의 아내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소문에서부터 성근의 필리핀 국적의 전처(前妻)도 어느 순간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는 이야기까지. 게다가 자신에게 자꾸만 '접근'하는 성근의 태도는 왜 저리도 의뭉스럽단 말인가. 


이상한 건 성근만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이 죄다 그렇다. 승훈의 주위를 맴도는 정체불명의 남자(조경환)는 도대체 누구일까.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성근의 아내 미숙(김주령)의 태도는 부담스럽기 짝이 없고,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조무사 미연(이청아)는 끈적하고 노골적이다. 안정적 삶이 붕괴된 충격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승훈의 입장에서 낯선 곳의 낯선 사람들이란 존재는 그 자체로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일터뿐만 아니라 집까지, 불안과 공포가 스며든다. 긴장은 풀어지지 않고, 불면의 밤이 늘어간다. 승훈의 히스테리가 늘어갈수록, <해빙>의 미스테리는 점차 증폭된다. 



"두 번의 경제위기가 휩쓸고 간 한국.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이미 무너졌고, 한 번의 실패는 영원한 계층 추락으로 이어져 그 어느 때 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사람들의 영혼을 잠식해 가고 있습니다. () 저는 미스터리 심리스릴러인 이 영화를 통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어떤 불안을 포착해 보고, 그것으로 인해 확인하게 되는 인간의 본성까지를 다뤄 보고자 했습니다." (이수연 감독)


<4인용 식탁>(2003)을 통해 데뷔했던 이수연 감독은 <해빙>을 통해 자신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치밀한 '심리 스릴러'를 선보였다. 전체 분량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던 조진웅의 열연은 말할 것도 없고, 승훈의 의심을 받는 정육식당 주인 성근 역을 맡았던 김대명의 연기 변신이 돋보였다. 섣불리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캐릭터를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김대명의 호연이 있었기에 <해빙>의 긴장감이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또, 기존의 청순발랄 이미지에서 벗어나 영화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미연 역을 맡은 이청아의 역량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신구의 독보적 존재감은 부연이 필요치 않아 보인다.


영화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분명 아쉬움이 있다. 개연성에 대한 지적은 물론이고, 과도한 음악의 개입이 몰입을 방해한다는 평에서부터 스릴러치고는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부정적 의견들이 많다. 지금 <해빙>이 받고 있는 낮은 평점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범인(악)'을 찾는(쫓는) 일반적인 스릴러와 달리 한 인물의 심리 변화를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둔 <해빙>의 결을 따라 승훈이라는 인물에 온전히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면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조각나 있던 퍼즐이 하나로 맞춰지는 순간이 주는 쾌감도 제법 시원한 편이다. 다만, '반전'에 대해서는 과유불급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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