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비밀스러운 영화 <싱글라이더>, 깊은 여운에 빠지다

너의길을가라 2017. 2. 26.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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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고은, <순간의 꽃> -


앞만 보고 뛰었다. 쉼 없이 달렸다. 무엇을 위해? 아마도 성공, 일까? 소위 세상의 문법을 따랐다. 안정된 직장에서 돈을 많이 벌고, 반듯한 가정을 꾸려 나가는 것 말이다. 노력했다. 최선을 다했다. 양심을 접어둔 채 고객들에게 부실 채권을 팔았고, 덕분에 승진을 거듭했다. 제법 젊은 나이에 증권 회사 지점장 자리까지 올랐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고, 아내와 하나뿐인 아들을 호주로 보냈다. 글로벌 시대에 '영어'는 필수였기 때문에, 그래야만 '가치'가 올라가기 때문에. 시차가 없는 호주는 최적지였다. 


기러기 아빠로 지내야 했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계획했던 '2년'은 곧 흘러갈 테니까.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 연락은 일상적으로 이뤄졌고, 아내와 아들은 가끔씩 동영상을 찍어 보냈다. 아들의 영어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무엇보다 여전히 삶은 바빴고, 분주했다. 가족을 돌아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나'를 살펴 볼 시간도 없는데, 다른 건 말해 무엇하랴. 그래도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중산층 가정이었다. 만족스러웠다. 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대형 부실채권 사건. 강재훈(이병헌)의 삶은 요동친다. 모든 것을 잃었다. 손 안의 모래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욕망'이 만들어 낸 거품이 사라지자 허망함이 남았다. 회사는 일순간에 무너졌고, 자신의 자리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윗선을 탓해보지만, 돌아오는 건 '너도 알고 있었잖아. 그러면서 왜 그래?'라는 핀잔뿐. 무릎을 꿇고 '죄송합니다'를 외쳤지만, 돌아오는 건 고객들의 분노뿐이었다. 뺨을 세게 얻어맞은 뒤, 그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내게 남은 건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불 꺼진 방, 재훈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사죄의 글을 쓰고, 비행기 티켓을 끊는다. 가족이 있는 시드니로 가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수면제를 한 움큼 집어 들고 입안에 털어 넣는다. 그는 '싱글 라이더(Single Rider, 홀로 떠난 여행객)'가 돼 여행을 시작한다. 낯선 땅, 낯선 존재가 됐다. 가방도 하나 없이, 그의 삶을 정직하게 말해주는 양복 차림, 손에 써넣은 주소 하나, 그저 빈손이다. 아내 이수진(공효진)와 아들 진우가 살고 있는 집에 도착했지만, 그는 선뜻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아내와 정체 모를 한 남자의 웃음소리. 혼란스럽다. 도대체 뭐지. 어떻게 된 거지. 저 남자는 누구지. 아내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겼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제야 보이기 시작한다. 돌아갈 곳이 없는 자신이 보인다. 재훈은 생각에 잠긴다. 자신이 부재했던 2년의 시간, 당연하다고 여겼던 그의 자리는 다른 존재(크리스)가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 세상이 얼마나 흉흉하냐며, 현관문 도어락에 민감하게 굴었던 아내가 이젠 고장난 현관문에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 간다. 더 이상 불안하지 않은 듯 하다. 


또, 포기했던 꿈, 내팽개쳤던 꿈에 다시 도전한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라 '이수진'으로 살아가는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래, '남편'으로서는 몰라도 '아빠'로서 나의 효용 가치는 여전한 것 아닐까. 재훈의 시선은 아들에게로 향한다. 그런데, 아픈 아들을 안고, 자신의 발이 상해가는 것마저 잊고 내달렸던 크리스를 보자, 더 이상 '내가 없어도 되겠구나'라는 확신이 생긴다. 재훈은 아내와 아들의 '행복'을 빌어주고, 진정한 의미의 '싱글 라이더(Single Rider)'가 돼 떠난다. 



사람들이 세속적인 욕망을 쫓고 있는데 어느 순간 그 욕망이 꺾일 때가 있잖아요. 그 무력함이 쌓이면서 사회 전체가 우울하게 되는 것 아닌가 생각했어요. 요즘 사회나 시스템의 부조리에 대해 고발하는 작품들은 많지만 저는 그런 상황에서 개인들이 느끼는 감정에 더 초점을 맞췄던 것 같아요. (이주영 감독)


<싱글라이더>는 '비밀'스러운 영화다. 여러 차례 '힌트'를 제시하지만, 사실 그 '반전'이 그리 중요하진 않다. 승부수는 거기에 있지 않다. '이야기'는 이미 탄탄하고, 배우들의 연기는 든든하다. '동양 사태'를 떠올리게 할 법한 사회적 문제(모럴 해저드)와 브레이크 없는 자본주의의 민낯, 기러기 아빠, 청년 실업, 노동자에 대한 인식 등 여러가지 사회적 인식이 다양하게 담겨 있지만, <싱글라이더>는 그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개인'들이 느끼는 '감정'에 오롯이 집중한다. 


이주영 감독은 영화 속에 '여백'을 최대한 많이 두고, 관객들에게 그 빈 자리를 스스로 채우도록 만든다. 그래서 일까. 여운이 깊게 남는다. 홀로 쓸쓸히 걸어가 절벽 앞에 선 재훈을 보는 관객들은 자신만의 '메시지'를 가슴 속에 안고 영화관을 나서게 된다. 전체 분량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배역의 비중이 컸던 이병헌은 섬세한 감정 연기를 통해 관객들을 집중하게 만든다. 블록버스터를 통해 표현되는 '강렬함' 못지 않게, '표정'만으로 미세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표현하는 이병헌의 연기는 <싱글라이더>의 '힘'이라 할 만하다.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즐비한 요즘, <싱글라이더>와 같은 감성이 짙게 밴 영화의 등장은 반갑기만 하다. 잔잔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잠시나마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하는 동시에 '사회', '가족', 그리고 '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어찌 이 영화를 추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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