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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부장판사가 <미스 함무라비> 통해 고백한 법원 내 만연한 성차별

너의길을가라 2018. 5. 25.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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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성추행 문제를 세상에 알렸던 서지현 검사의 용기있는 고백은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던졌다. ‘미투 운동’을 전방위적으로 확산시키는 한편,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던 음습하고 저질스러운 문화를 밀어내는 데 큰힘이 됐다. 혼자 속앓이를 해야만 했던 수많은 피해자들에게 위로를 건넸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살았던 수많은 가해자들에게 경각심을 불어 넣었다. 


서지현 검사가 증폭시킨 미투의 불씨는 사회 각계각층으로 삽시간에 번져 갔다. 물론 많은 피해자들의 고뇌와 결단, 생존의 두려움을 이겨낸 용단이 더해진 결과였다. 그런데 시끌벅적했던 검찰과는 달리 법원의 분위기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법원은 성폭력 및 성차별이라는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던 걸까. 오히려 미투 운동이 전개되지 않는 집단이 훨씬 더 부패한 조직이라는 이야기가 설득적이다.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강자의 성폭력, 가해자를 처벌하고 징계하기는커녕 피해자를 음해하고 괴롭히면서 피해자에게 치욕과 공포를 안겨주어 스스로 입을 닫게 하는 현실을 참을 수 없었다." (서지현 검사)


고발자는 생존을 위협받고, 조직으로부터 철저히 배척되며,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피해자에게 왜 말하지 않느냐고 몰아세우는 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게다가 이젠 실명을 대지 않으면 귀를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는 잔혹한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던가. 게다가 무려 검사의 문제제기에도 검찰은 자정의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은폐의 길을 걷고 있지 않은가. 


김영란 전 대법관은 "‘법원에 여성 수가 늘어나면 조직의 질이 떨어진다’고 공공연하게 얘기하는 판사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또, "재판부의 여자 배석판사가 재판장한테 성희롱 관련 문제를 제기했고, 재판장이 사직서를 쓴 일이 있었"는데, "인사이동 때마다 '저 판사가 그 판사지' 하는 식으로 낙인찍혔"던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법원은 피해자에 대한 가해가 심한 조직"이라는 말에서 법원 내 미투 운동이 잠잠한 까닭을 알 듯 하다. 


최근 방영 중인 JTBC <미스 함무라비>는 '생 리얼 법정 드라마'를 자처한다. 현직 부장판사 문유석 씨가 자신의 동명소설을 각색해 극본을 썼다. 아무래도 ‘디테일’이 남다른데, 드라마는 법원 내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비중있게 다룬다. 또, 남성중심적인 구조에서 비롯된 뿌리깊은 성차별의 문제도 녹여내고 있다. 극의 분위기가 발랄한 터라 재치있는 대응이 주로 그려지고 있지만, 현직 판사의 간접적인 고백이라 의미가 깊다. 



"그리고 그 여학생도 문제야. 그렇게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 거 아니야."

"부장님, 짧은 치마를 입은 피해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상한 짓을 하는 추행범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서 말대꾸야. 여학생이면 여학생답게 조신하게 입고 다녀야지.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야. 여자로 만들어지는 거지. 노력을 해야 여자다운 여자가 되는 거야."


부장판사 한세상(성동일)과 초임 판사 박차오름(고아라)의 첫 만남. 한세상은 지하철의 성추행범을 잡는 기지를 발휘한 박차오름에게 한소리하면서 성범죄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매우 위험한 관점을 노출한다. 박차오름이 이를 바로잡기 위해 애써보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도리어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노력을 해야 여자다운 여자가 되는 거'라는 심각한 성차별적 언어와 편견에 사로잡힌 말까지 듣게 된다. 


"판사로서 이런 옷차림이 가당키나 해? 화려하고 치마도 짧고!"

"법관 윤리강령에 치마길이 규정이 있나요?"


튈 바에야 화끈하게 한번 튀어보는 성격의 박차오름은 화려한 색깔에 짧은 치마를 입고 출근을 해 한세상을 기함하게 한다. 판사로서 이런 옷차림이 가당키나 하냐는 꾸짖음에 법관 윤리강령에 치마길이를 규정한 내용이 있냐며 되받아치는 배짱. 그리고 조신한 옷으로 갈아입겠다며 이슬람 여성의 전통의상(니카브)을 입고 나타나 부장판사를 기겁하게 만든다. 비현실적인 대응이지만, 속이 시원해지는 맛이 있다.



"임 판사는 결국 자는구만. 그렇게 잘난척을 하더니 (주량이) 여자만도 못해."

"어우, 부장님. 여자만도 못하다, 그런 말씀 들으니까 듣는 여자 기분이 상큼해지는데요?"

"어른이 개떡같이 얘기해도 아랫사람이 찰떡같이 알아들으면 되는 거 아냐."

"처음부터 찰떡같이 말하면 될 걸, 굳이 개떡같이 말해놓고 찰떡같이 알아들으라니. 그게 뭔 개떡 같은 소리야."


성차별적 언어는 회식 자리에서도 이어진다. 술에 취해 쓰러진 남성 판사를 두고, '여자만도 못하다'는 말을 늘어놓는 한 부장판사.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은 박차오름이 아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재치있게 받아치며 잘못을 지적한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엄연한 성차별이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라'는 변명에 먼저 뻗었던 임바른(김명수)은 '처음부터 찰떡같이 말하라'고 어퍼컷을 날린다.


물론 <미스 함무라비>는 코믹스러운 분위기를 취하고 있고, 따라서 법원 내의 구성원들 간에 발생하고 있는 성차별적 언행도 다소 가볍게 그려내고 있다. 그런 상황들 속에서 나타나는 박차오름의 대응 역시 따라하기엔 너무 만화적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직 부장 판사가 간접적으로나마 고백하고 있는 법원 내의 분위기를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미스 함무라비>는 제법 가치있는 드라마라 할 수 있다. 


성범죄의 원인을 피해자의 옷차림에 돌리는 충격적인 발언이 여전히 법원 내에 잔존(이 아니라 만연일지도 모르겠다)하고 있고, 법원 내 여성의 옷차림을 지적하고, 치마 길이를 규정하는 5공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여자다운 여자'라는 성편견에 가득찬 생각들로 여성을 바라보는 시대착오적인 공간. 지금의 법원은 보수적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곳은 아닐까. 


현직 부장 판사가 쓴 드라마, 그조차도 모든 걸 다 드러낼 수 없었으리라. 조직에 큰 누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그조차도 재미를 가미해 각색한 결과물일 것이다. 그러나 저 약간의 고백만으로도 충분히 알 듯 하다. 그곳의 공기가 어떠할지 말이다. 서지현 검사의 사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하물며 검사도 저러한데..'라고 탄식했다. 하물며 판사라고 다르겠는가. 참으로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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