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그를 예능인이라 부르기가 어색하지 않다. 8년이면 중견 예능인의 위치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송에서 그가 보여주는 역할이나 분량을 놓고 보면, 이제 든든한 ‘에이스’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아시아 프린스’라는 오글거리는 별명도 새삼스럽지도 않다. 이미 수 차례 해외 로케를 통해 그의 인기가 증명됐기 때문이다. SBS <런닝맨>의 ‘기린’, ‘배신의 아이콘’ 이광수 이야기다.
개인적인 호불호를 묻는다면, ‘이광수를 좋아한다’고 말할 것이다. 8년 전부터 그랬다. 그는 예능계에서 유일무이한 캐릭터였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겁을 상실한 채 김종국과 맞서고, 지석진과 연대와 배신을 반복하고, 예측불허의 언행으로 웃음을 연출한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게스트를 구분하지 않았다. 예능의 신이 강림했던 날계란 깨기는 지금도 즐겨보는 짤이다.
단지 예능에서 보여주고 있는 캐릭터 때문만은 아니다. 배우로서 그의 재능도 격하게 아낀다. 얼마 전 종영한 tvN <라이브>에서 이광수가 보여준 연기는 박수받아 마땅했다. 또, <탐정: 리턴즈> 개봉도 앞두고 있다. 이광수는 (예능을 부업으로 뛰고 있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예능의 이미지를 드라나마 작품으로 연결시켰고, 그래서 부담 없이 혹은 제약 없이 예능을 즐길 수 있었다. 할말 못할 말 다 하면서.
"너 꽃뱀이지?"
"혜정이는 불여우입니다!"
지난 27일 <런닝맨>은 AOA 설현과 혜정, 위너 송민호와 강승윤, 모모랜드 주이, 우주소녀 다영이 출연했고, ‘좀비 커플 레이스’라는 콘셉트로 방송이 진행됐다. 이광수는 커플이 된 혜정을 의심하며 ‘너 꽃뱀이지?’라고 몰아세웠다.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웃음을 위한 것이었다고 변명하지 말자. ‘꽃뱀’이라는 말이 ‘남자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몸을 맡기고 금품을 우려내는 여자’로 사용된다는 걸 몰랐을 리 없다.
<스포츠 조선>의 김영록 기자는 ‘뜬금없는 막말 논란’이라며 이광수를 싸고 돌았지만, 그의 발언은 명백한 사실이며 그에 대한 시청자들의 비판은 당연스러운 일이다. 막말을 하는 게 그의 캐릭터라는 어줍잖은 쉴드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시청자들은 ‘닥쳐’ 정도의 말을 했다는 걸 문제삼는 게 아니니까. 제작진은 문제가 될 거라 생각했는지 ‘너 사기꾼이지?’라는 자막을 달아 순화시키려 애썼지만, 이광수의 발언은 고스란히 방송을 탔다.
사회 전반에 만연한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이들을 ‘꽃뱀’이라 부르는 이른바 ‘미투 꽃뱀설’이 대두되고 있다. 성범죄와 관련한 무고죄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여 주장하고 있다. (수사기관에 신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애초에 무고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성폭력 무고 비율이 전체 무고 사건의 40%’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데이터를 제시하며 음해까지 서슴지 않는다.
꽃뱀 등으로 현상화되는 가해자 위주의 관점은 겨우 용기를 낸 피해자들에 대한 2차 가해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피해자들을 옥죄는 굉장히 폭력적인 언어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런닝맨>의 경우 초등학생 시청자가 많다는 점에서 시청한다는 매우 부적절하다. 왜곡된 여성관을 심어줄 우려가 크다. 이광수의 말을 고스란히 따라하는 초등학생들을 떠올려보라.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사실 이광수의 폭주는 하루이틀이 아니다. 남매 같은 사이 송지효를 때린 건 여러 차례이고, 배우 이다희에게 "너 배 한대 맞을래?"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의 폭력적 언어는 곧 행동으로 발현되기도 했는데, 배우 김지원의 울대를 때린 게 그 대표적인 예다. 워낙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는 김종국에 대항해 짓궂은 장난을 하거나 폭력을 쓰는 건 용납됐지만,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 힘을 사용하는 모습은 불편함을 자아낸다.
예능인 이광수를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거침없다’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엔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무엇이든 과하면 문제가 발생하고,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는 법이다. 가속도가 붙는 건 당연한 일인데, 브레이크가 없다는 건 그래서 위험하다. 혹은 브레이크를 밟는 법을 잊어버렸든지. 이광수에겐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이광수의 선의를 믿기 때문에 직언이 통하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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