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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송곳>의 '이수인'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너의길을가라 2015. 12. 1.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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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를 만들지 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불편한 분위기는 있었다." (김석윤 PD)


처음으로 노동자의 입장에서 열악한 노동 환경을 조명(照明)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노조(勞組)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던 JTBC 드라마 <송곳>이 12회를 끝으로 종영했다. 누구에게도 쉽지 않았다.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에게도, 드라마를 보는 사람에게도 <송곳>은 불편하고 버거운 드라마였다. 왜냐하면 그 안에 우리들의 진짜 '삶'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판타지'를 원한다. 자신의 남루한 현실을 바라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굳이 '드라마'를 통해 그 비루함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할 사람은 없다. 재벌 2세와 달콤한 사랑에 빠지는 신데렐라 이야기에 환호하고 몰두하는 것은 잠시마다 고달픈 삶에서 벗어나고픈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드라마에서라도 좀 행복하고 싶다'는 아프고도 간절한 마음 말이다. 



높다고도 할 수 없고,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최종회 시청률 1.9%(닐슨코리아)가 상징하는 것은 바로 외면하고 싶은 본능과 그럼에도 응시(凝視)하고자 하는 이성의 충돌 사이 서 있었던 사람들의 처절한 고민이리라. 그렇기에 <송곳>은 의미 있고 소중한 드라마다. 한참을 곱씹고 되새겨도 부족하고 아쉬움이 남는 그런 드라마. 자, 다시 한번 <송곳>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분명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제 스스로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 걸음 내딛고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


"비겁하고 무력해 보이는 껍데기를 자꾸 흔들고 압박하면 분명히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



<송곳>은 최종회에서 푸르미 마트 노조의 작은 승리를 보여줬다. 해고자의 전원 복직, 미지급 임금에 대해 조건 없는 지급, 손해배상 청구 취하, 조합원 비조합원의 전원 고용 보장 등과 함께 업무 환경 개선이라는 목표를 성취했다. 힘겨운 싸움 끝에 얻어낸 값진 승리였다. 노조는 웃었지만, 노조 위원장으로 앞장서 싸웠던 이수인 과장은 '푸르미 인재 개발원'으로 쫓겨났다. 


사무실은 텅텅 비어 있었고, 컴퓨터 하나 없는 책상만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며 조용히 푸르미 마트를 떠났던 이수인 과장은 어쩔 수 없는 '송곳'이었다. PC방에서 이메일을 확인하던 그는 노조원들의 응원이 담긴 메시지를 읽고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푸르미 마트 프랑스 본사에 "나는 한국 푸르미 노동조합 위원장 이수인이다. 내 책상엔 컴퓨터가 없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쓰기 시작한다. 새로운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감히 '우리에겐 이수인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아니, '우리는 이수인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달랐다.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었다. 노조 위원장이 추천한 주용태 노동상담소 소장과 맞서는 장면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물론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둘 중 하나의 노선을 선택하라면 주저없이 이수인을 택할 것이다. 


과격파인 주용태는 첫 만남에서부터 "로가 있는 인간은 위기가 닥치면 빠져나오기 마련이다. 당신들은 싸움을 모른다. 그럼 내 지시대로 따를 수 있냐. 당신들의 각오가 없으면 우린 같이 못 한다. 당신들이 각오를 보여주면, 우리 활동가와 학생들이 끝까지 함께할 것"이라며 이수인을 압박한다.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수인은 주용태와 손을 잡는다.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구고신과는 달리 주용태는 사상과 이념으로 똘똘 뭉쳐 있고, 경직되고 적개심이 가득한 언어를 사용해 사람들을 자극한다. 싸움의 방식도 정반대다. 캐셔가 참여하지 않는 파업은 의미가 없다며 파업을 미루라는 구고신과 달리 주용태는 훨씬 적극적이고, 심지어 불법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 "이 싸움을 일동 지부만의 싸움이라고 생각합니까?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관철하려는 초국적 자본의 음모에 맞선 투쟁입니다. 서비스업에서 노동 유연화에 맞선 선도적 투쟁을 하고 있다는 책임을 느껴야 해요. 근시안적인 경제적 이득과 조합주의에 매몰되서 안전한 투쟁만 해서는 조합원들의 의식이 성장할 수 없어요. 싸움을 통해서만 각성할 수 있습니다. 강고한 투쟁을 통해 총 자본과의 일전을 불사할 각성된 선진 노동자를 만들어내야 돼요."

▷ "지금 그 말 우리 조합원들에게 그대로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당신들 일자리 지키는 데 관심 없다. 더 강한 싸움으로 세상과 맞서 싸울 전사를 길러내는 게 이 싸움의 목표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냐고요."

▶ "그런 타협적인 투쟁은 노예 상태를 연장할 뿐입니다."

▷ "회사에서 짤리면 노예 아닌가요? 월급 못 받는 노예보다 월급 받는 노예가 낫잖아요."

▶ "밥 한 끼 더 먹는다고 감옥이 아닌 게 되진 않습니다. 감옥을 무너뜨릴 생각을 해야죠."

▷ "감옥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옥이라 하더라도 감옥 밖에 뭐가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은 감옥을 만들 수 있다면 저는 그걸 하겠습니다."


이념으로 무장한 노조의 '윗대가리'들이 말하는 '초국적 자본', '노동 유연화', '선도적 투쟁', '일전을 불사'와 같은 말들은 이수인에겐 무의미하다. 그에겐 눈 앞의 노조원들이 중요하고, 이들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일자리로 복귀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서 "법을 어기는 싸움은 하지 않겠다"며 주용태의 지시를 거부하고, 주용태의 방식에 맞선다. 


"그게 된다고 생각하느냐. 법을 지켜도 불법으로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들어 수 있다"며 불만스러워하는 주용태에게 이수인은 "우리가 먼저 법을 어기면 당당해질 수 없다. 조합원들에게 약속했다. 이 싸움으로 누구도 다치지 않게 하겠다고 했다"고 대답한다. 기존의 노조들의 몸에 베어있던 관습적인 싸움 방식을 따르지 않고, '경험 없는' 이수인은 자신만의 싸움 방식을 선택한다.



<송곳>이라는 드라마다 더욱 특별했던 이유는 이처럼 '노조'의 내부를 가감없이 드러냈다는 데 있다. '판타지'로 뭉개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치부까지 보여줌으로써 고민의 폭을 훨씬 넓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관철하려는 초국적 자본의 음모에 맞선 투쟁'이라는 말은 소위 좌파 지식인의 전가의 보도가 아니었는가? 하지만 당장 생계의 위협에 놓인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노조원들을 지키기 위해 간부 투쟁으로 전환하고, 홀로 단식투쟁에 나서는 이수인 과장의 모습은 참다운 리더의 모습이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듯 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본사의 인사 담당자가 한국에 온다는 소식에 마지막 투쟁을 준비하자는 이수인 과장의 호소에 노조원들은 밝은 모습으로 참여해 감동을 선물했다. 물론 그것마저도 '판타지'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수인의 방식을 나이브(naive)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싸움을 하고 싶다. 적어도 당당하게 싸우고 싶다. 그러다 설령 고꾸라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송곳>의 시대적 배경이 된 2003년과 2015년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 씁쓸한 질문 앞에 우린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더 강한 투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이지 못했기 때문일까? 노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수인'에게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진 않을까?



▶ "그러니까 노조를 조직해보겠다, 이 말씀이다, 그죠? 아저씨 좋은 사람인 거 알겠어요.좋은 사람인데, 아저씨 지금 나쁜 사람 되기 싫어서 이러는 거잖아요. 몸에 똥 안 묻히고 변소 못 치워요. 내 아저씨 같은 사람들 숱하게 봤는데, 제 손 더러워지는 거 못 견뎌요."

▷ "각오 하고 있습니다."

▶ "기억하세요. 우린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예요." 


어느 한 쪽을 무작정 선으로 설정하고,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을 악으로 규정하는 섣부른 선긋기를 하지 않고,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던 <송곳>은 더욱 의미 있고, 소중한 드라마다. 불편함을 이겨내고 <송곳>을 시청하며 함께 울고 울었던, 설령 외면했더라도 그 아픈 마음을 기억했던 수많은 시청자들에게 '토닥토닥'을 해주고 싶다. 


시시한 약자를 위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하나의 송곳이 바스라지면, 또 다른 송곳이 나타나 그 빈자리를 채울 것이다. <송곳>이 마지막 장면으로 노무사가 된 문소진이 자신의 코멘트를 따라하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짓는 구고신의 모습을 선택한 것은 이런 순환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끝없는 거대한 싸움에서 <송곳>은 말한다. 결국 '사람'이라는 것 말이다. 첫째도 사람, 둘째도 사람, 셋째도 사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단 한가지가 있다면, 그건 결국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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