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품고, 낳고, 키우는 것은 그냥 해도 힘들다. 그 와중에 이것이야말로 여성에게 부여된 숭고한 목적이라고 생각하면 피곤해지고, 여성을 추락하게 만드는 원흉이라고 생각하면 비참해진다." (p. 225)
아이를 낳지 않는 시대이다. 2022년 합계 출생률은 0.78명으로 집계됐다. 조만간 발표될 2023년 합계 출생률은 그보다 더 떨어져 역대 최저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 정부는 엄청난 예산을 쏟아붓고, 여러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바닥으로 향하는 저 숫자의 방향을 트는 데 실패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 시의적절한 책이 출간됐다. <출산의 배신>이다.
저자 오지의는 '산부인과 의사'이자 '아기 엄마'이다. 이 두 가지 정체성은 출산에 대한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를 들려줄 거라는 기대를 품게 만드는 동시에 그가 발견하고 경험한 '배신'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저자는 임신과 출산, 수유 등 초기 육아의 경험 전체를 '재생산'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데, 과연 산부인과 의사에게도 재생산의 과정이 배신으로 다가왔을까.
병원에 찾아와 "왜 애 낳는 게 이런 거라는 걸 아무도 말을 안 해줬을까요?"라고 하소연하는 임신부들을 수없이 만났던 저자는 자신의 출산은 다르리라 여겼다고 고백한다. 해박한 지식을 습득하고 있는 만큼 평탄하고 순조로울 거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아기가 낳는 '주체'가 되어 본 경험은 완전히 달랐던 모양이다. 저자는 재생산의 전 과정이 온통 배신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증언한다.
"임신한 신체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변할까?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모든 것이 변한다. 태아는 겨우 9개월짜리 세입자 주제에 엄청나게 요란한 리모델링을 한다." (p. 15)
임신의 배신은 '변신'이라 할 정도로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다. 자궁의 용량이 최대 1000배까지 증가하고, 인체의 거의 모든 장기가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단순히 배가 부르는 것뿐만 아니라 "신진대사와 혈당 조절 기준이 태아를 위해 변화"하고, "수분이 늘어나서 인체의 조성이 변"한다. 심장이 더 빨리 뛰고, 뇌 구조도 변하고, 폐 부피도 달라진다. 갑상샘 호르몬 수치, 콩팥 기능도 조정된다.
태아를 "9개월짜리 세입자"에 비유한 대목은 참신하고 적절하다. 그 단기 세입자의 "엄청나게 요란한 리모델링"으로 인해 "우리 몸은 임신 같은 거대하고 장기적인 영향에서 자유로운 부분이 사실상 없"으니 임신이란 얼마나 고된 일인가. 여기까지만 읽으면 겁먹는 독자도 있으리라. 가뜩이나 출생률이 낮아 심각한데, 출산 장려 정책에 반대 운동이라도 하려는 걸까.
책의 초반부터 저자가 미화 없이 임신과 출산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까닭은 의도가 명확하다. 신화와 비극을 넘어서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장이나 폄하 없이 재생산의 전 과정을 온전한 이해해야 한다. 저자는 "여성의 몸은 출산 때문에 희생당하는 제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재생산은 그 주체가 커다란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단언한다.
문제는 안 그래도 힘든 임신과 출산을 더 어렵게 하는 장애물이 산적해 있다는 점이다. 여성들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산부인과의 '굴욕 의자', 최근 10년 사이에 분만 병원의 1/3이 줄어들며 가시화된 '출산 인프라' 문제, 재생산의 과제를 엄마에게 강요하는 공고한 '모성 신화' 등이 그것이다. 저자의, 의사로서의 의학적 지식과 엄마로서의 실체적 경험이 더해져 책은 훨씬 풍성하고 생동감 넘친다.
"모성이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불필요한 구속을 감수하는 데에 그 힘을 소모할 이유는 없다. 금기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기꺼이 보장하는 것, 그것이 진짜로 임산부를 위하는 것 아닐까?" (p. 181)
다양한 장애물에 대해 저자는 자신만의 대답들을 제시한다. 산부인과 의사와 임신부의 중간자적 위치에서 전하는 설명은 설득력이 있고, 제약과 금기를 최대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은 속시원하다. 저자가 특별히 강조하는 건, 출산과 양육이 엄마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류에게 출산은 주변/사회의 수많은 조력자들이 함께 했던 일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과거처럼 커다란 (가족) 공동체가 유지되고 있지 않지만, 현재도 그 틀은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는 물론이고, 조부모, 친지들, 보조적으로 산후관리사, 베이비시터, 친구들까지 모두 조력자이다. 보다 넓은 차원에서는 "진료 시간을 조정해준 병원 원장님", "아기의 울음소리를 양해해주는 이웃들", 또 "양육 수당이나 보육 시설, 육아 휴직과 같은 사회적 인프라"도 조력자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산부인과 의사인 저자에게 재생산 과정은 어떤 의미로 다가 왔을까. 그는 "나는 의사, 당신은 환자'라는 이분법 안에 강하게 갇혀 있었"던 자신을 반성하며, "임신 중 아기에게 이상이 발견되면서 내 마음 속 경계선이 지워"졌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살다 보면 약해질 때도 있고, (...)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임신을 해야만 임산부를 이해할 수 있는 걸까. 물론 만삭이 되기 전까지는 횡단보도를 제 시간에 건너는 것조차 누군가에겐 어려울 수 있음을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에게는 타인과 공명하기 위한 설비가 갖춰져 있"다는 점을 들어 그렇지 않다고 설파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남과 입장을 바꿔볼 수 있고, 문학 같은 가상 상황에도 몰입할 수 있"는 것이다.
<출산의 배신>은 재생산의 전 과정을 온 몸으로 겪어야 하는 여성 입장에서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지만, 배신 너머에 계산할 수 없는 충만감과 기쁨, 깨달음이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다만, 그 배신을 혼자 감당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인간은 서로 돌아가며 아기를 돌보고, 지식을 전수하며, 협조적으로 자원을 공유"한다는 점을 거듭 상기시킨다. 저출생의 시대에 꼭 읽어야 할 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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