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으면 연례행사처럼 하는 일이 있다. '탐색'이다. 매년 어느 곳으로 여행을 떠날지 탐색한다. 구글 지도를 펼쳐놓고 가상의 여행을 떠나는 식이다. 2024년의 목표는 쉽게 정해졌다. 바로 '뉴욕'이다. 세계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 화려함과 다채로움의 끝판왕. 오래 전부터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매번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가게 되면 미리 공부를 많이 하는 편이다. 어떤 이들은 홀연히 떠난 곳에서 우연이나 예상치 못한 경험을 하는 것을 여행의 묘미로 꼽기도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주의라서 예습은 필수이다. 공부의 첫 단계는 지도를 유심히 살피는 것이다. 지도를 통해 뉴욕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집어넣는다. 구글 지도는 굉장히 자세하고 정보가 풍부한 교과서라서 유용하다.
그 다음 단계는 역시 책이다. 시중에서 많이 판매되고 있는 여행 책자를 구입하는 것도 좋지만, 그런 책들은 너무 사무적인 느낌이라 벌써부터 보기는 부담스럽다. 뉴욕이라는 여행지에 대한 이미지를 그리기 위해서는 좀더 상냥한 뉘앙스로 쓰인 책, 그러니까 여행 에세이가 좋다. 책 속에 담긴 다양한 에피소드를 읽으며 그 공간에 대한 궁금증과 애정을 키워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JIN. H(허미진)의 <여기, 내가 사랑한 뉴욕이 있어 : 한 달 동안 뉴요커로 살아 보기>를 선택한 건 자연스러웠다. 무엇보다 저자가 ’한 달 동안 뉴요커로 살‘았다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잠시 뉴욕을 '들렀다가 떠난' 여행자가 아니라 일정 기간 뉴욕에 '머물렀던' 뉴요커로서 쓴 책이라는 점에서 다른 시선으로 들려줄 이야기가 많을 거라 기대하게 됐다.
'OO에서 한 달 살기.' 아마도 많은 이들의 꿈일 것이다. 어쩌면 가장 흔한 버킷 리스트이리라. 하지만 "홀로 여행을 떠나거나 30일 이상 머물며 '여행은 살아 보는 거야'란 명언을 직접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진 않"(p. 156)다. 단지 열정만 가지고 움직이기에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금전적인 문제, 돌아온 이후의 삶에 대한 고민 앞에 주저하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남들보다 사회 생활을 시작한 지 불과 1년 만에 퇴사를 결정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저자가 4대 보험이 보장되는 멀쩡한 회사를 그만두고 갑자기 뉴욕으로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해외에서 학교를 다니거나 살았던 직장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고 문화 충격을 느꼈다고 한다. ‘해외파’들을 통해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 의문 부호를 갖게 된 것이다.
"화려한 불빛이 일렁이는 뉴욕의 밤거리를 무작정 걷던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이곳에서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혼자여도 괜찮네.'" (p. 79)
20대의 나이였기에 가능한 일일 수도 있고, 남다른 추진력 때문에 저지를 수 있었던 모험이다. 저자가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 한 여행이자 타국에서 살아본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간접 체험"(p. 156)의 장소로 뉴욕을 선택한 이유는 세 가지다. 누구나 알 만한 세계적인 도시인가, 차가 없어도 편히 다닐 수 있는가,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가.(p. 8) 저자에게 뉴욕은 최적지였다.
<여기, 내가 사랑한 뉴욕이 있어>에는 "한 달 동안 뉴요커가 되어 살아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뉴욕 구석구석"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감상하는 경험은 뉴욕 여행에서 흔한 일이지만, 로터리(추첨)에 도전하는 건 체류하는 시간이 많아야 가능한 특별한 경험이다. 실제로 저자는 추첨을 통해 맨 앞자리에서 '위키드'를 관람하기도 했다.
크리스티, 소더비 같은 옥션 하우스를 방문하면 무료로 예술 작품을 구경할 수 있고, 다과도 공짜로 즐길 수 있다는 정보도 흥미로웠다. 시간이 촉박한 여행자라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MoMA),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같은 주요 스팟을 훑기도 바빴을 텐데, 저자가 한 달이라는 시간을 확보한 뉴요커였기에 가능한 여유였다. 아무래도 마음가짐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할렘가에 있는 명문대 컬럼비아 대학을 방문해 그곳 대학생들의 남다른 학구열을 느낀다거나 맨해튼 한복판에 있는 뉴욕 공립 도서관을 찾아 그곳이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라 뉴요커의 삶을 녹아낸 공간(p. 89)"임을 깨닫는 대목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짧은 기간 동안 여행을 한다면 우선순위에서 밀릴 가능성이 높은 곳이었기에 저자의 경험담이 귀했다.
"뉴욕은 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부터 밤새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까지 나를 찾아왔고 맑은 하늘에도 예기치 않은 비를 종종 만나곤 했다. 그리고 나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p. 101)
그밖에도 루스벨트 아일랜드 트램웨이를 타고 해질 녘의 뉴욕 하늘과 맨해튼의 야경을 즐기고, 링컨 센터에서 느긋하게 발레 공연을 감상하며 뉴욕의 밤을 만끽했다는 이야기도 뉴욕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특히 비를 그토록 싫어했던 저자가 뉴욕 생활을 통해 변화하는 과정, 뉴욕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고 고백하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났다.
저자는 한 달 동안의 뉴욕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었을까. "혼자 그리고 한 달 동안 살아보는 여행"을 떠났던 그는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았다며 나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됐으며, "앞으로 나아갈 용기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p. 156)을 선물받았다고 썼다. 또, "더는 같은 사람일 수가 없“(p. 164)다며 달라진 스스로를 발견했다고 선언했다. 그보다 값진 여행이 또 있을까.
<여기, 내가 사랑한 뉴욕이 있어>는 혼자 여행 떠나기를 주저하는 사람(특히 여성)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저자가 그랬듯, "겁에 질려 도착했던 눈동자가 이제는 웬만한 일에는 끄덕하지 않는 단단함으로 변해 있(p. 165)"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OO에서 한 달 살기'를 버킷 리스트에 넣어둔 채 머뭇거리고 있는 사람에게도 큰 용기가 될 것이다.
나는 6월 뉴욕으로 떠날 예정이다. 한 달까지는 아니지만, 보름 정도 뉴욕에 머무를 예정이다. 저자처럼 뉴요커가 되어 생활인으로서의 여유를 갖고, 느긋한 마음으로 뉴욕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여행이 끝난 후 뉴욕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나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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