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집(散文集)을 고를 때, 아무래도 우선하게 되는 요인은 '작가'이다. 물론 굳이 산문집이 아니더라도 그렇겠지만, '가짜 이야기'가 아니라 좀더 내밀한 '자신'을 드러내게 마련인 산문집은 작가가 더욱 중요하다. '편협'하다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읽게 되는' 산문집은 대개 제한적이다. '아는 작가'가 없어 손이 닿는, 아무 책이나 집어 들어 '탐독(耽讀)'하던 시기가 지나고 나면 그런 시기가 오게 된다.
물론 '가끔' 예외가 있다. 진열되어 있는 책 중에서 몇 권을 '후루룩'넘겨보다가보면 '이 글들은 잃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을 만나게 되는 드문 순간이 있다. 표지나 편집, 또는 제목이 그런 '매력'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역시 '글'이고, 스냅사진처럼 넘겨지는 페이지 속에서 '문장의 밀도'가 느껴지는 책들이 있다. 김사과의 『0 이하의 날들』은 바로 그런 산문집이었다.
약간의 주저함은 있었다. 책의 속 표지를 통해 '김사과'라는 작가가 '젊은', 심지어 '또래'라는 것을 대략 눈치챌 수 있었고, 차분하고 담담하게 쓰여진 '서문'을 통해 이 산문집의 정체가 그의 '20대'를 담아낸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우선,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20대' 시절의 '생각'을 굳이 다시 들추어 읽는다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무엇보다 또래의 글을 읽는다는 건 (또 다시 편협하게도)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작가들이 밀도 있는 글 솜씨를 뽐내고, 깊이 있는 고민과 그로부터 나오는 혜안(慧眼)을 보여줄 때는 '그래, 저 나이라면 그럴 수 있지'라고 위안을 삼을 수 있다. 그로부터 마음껏 배우고, 스스럼 없이 깨달음을 전수받아도 부끄럽지 않았다. 무작정 빠져들어도 심지어 괜찮았다.
하지만 '또래'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물론 또래의 글을 읽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님에도, '괜찮은' 또래의 글은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저들은 나보다 깊이 사유하고 훨씬 더 농도 깊은, 치열한 고민들을 하고 살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나를 지체하게 만든 요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또래'와 '20대'라는 두 가지 조건은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별개'로 존재했다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또래'가 쓴 '20대'라면 다르다. 비슷한 '또래'가 경험한 '20대'는 어떤 것이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윗세대'들이 '나의 20대는 이러했다'고 휘갈겨 놓은 글들을 숱하게 읽었지만, 같은(혹은 비슷한) 세대의 그것을 '생생하게' 듣고 경험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기에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20대 땐 혈기는 있었는데 포커스를 잘 맞춰 글을 썼다는 느낌은 적어요. 지금 보면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거든요. 이제는 좀 더 날카롭게 무언가를 쌓아가야 되지 않을까 해요."
어쩌면 이제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다. 갓 20대를 지나온 우리들이 당시를 회고하는 글들이 쏟아지는 일 말이다. 『0 이하의 날들』은 김사과가 20대에 펴냈던 몇 편의 소설로는 풀어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담아낸 책으로,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여러 매체에 발표했던 글들의 모음집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나의 20대가 오롯이 담긴 글"이면서 "뭐라도 해보겠다고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0 이하로 주저앉고 만, 그 궤적이 적나라하게 담긴 기록"이다.
쓰는 것밖에 잘 하는 게 없었다고 말하는 그에게 '쓴다'는 것은 혹은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서문에서 그는 "쓴다는 것은 기록한다는 것이고 기록한다는 것은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잊지 않겠다. 망각되지 않겠다. 온 힘을 타해 시간에 저항한다. 쓴다. 시간 속에서 멀어지는 모든 것들, 사라지는 목소리들, 보서지는 모든 것의 잠을 깨윅 위해, 나는 쓴다."고 밝히고 있다.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잠에서 깨어나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접한 그가 회상하는 스무살 안팎의 삶은 '질투'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처절했고 막막했다. '생리통이 아니라 생리대를 살 돈이 걱정'어있고, 시간당 천오백원을 받고 사장에게 성희롱을 당하며 돈까스집에서 일했던 상황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악화'되어 갔다.
'경제적 궁핍을 경험해본' 그는 '예술이 위대하다거나 고귀하다는 명제를 지지할 수 없었'고, 그가 다닌 예술학교와 예술계에 대한 위화감은 그가 쓴 글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쯤되자 밀도 높은 그의 글들이 이해가 됐다. '고통'을 부러워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위선이지만, 지극히 평탄한 삶을 살아왔던 내가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고민들이었다. 또, 삐딱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은 감탄을 자아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적의가 있다.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똑똑한 말을 늘어놓기 위해 벼랑 끝에 설 것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향한. 대체 뭘 위해서 그런 식으로 거듭 나아져야 하는 걸까? 나는 삶을 살아가는 법을 알고 싶은데, 이런저런 것들을 위해 삶을 제물로 바치라는 이야기만 들려온다."
글 전체를 흐르는 기조는 '비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꿈틀거리는 대표적인 감정은 '화(분노)'이다. "절망 앞에서 화를 냈을 뿐"이라고 말하는 그는, 자신의 '화'를 스스로를 비롯해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국가로 쏘아댄다.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는 제목을 달긴 했지만, 그의 태도가 '분노해주세요'라고 애걸복걸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분노'는 당연한 선택지가 아니다.
그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완벽히 길들여진 세대로 자라온 당시의(또 지금의) 20대에겐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분노'가 '삶 그 자체'였던 과거의 386세대가 지금의 청년들을 한심하다 여기곤 하지만, 지금은 '유사 스타벅스'라는 공간에서 "혁명을 외치는 밥 말리의 목소리가 커피향과 뒤섞여 토익 책에 머리를 박은 유니클로 차림의 여자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장면"과 같은 "모순적 풍격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시대가 아니던가?
그래서 글자 하나하나에 인이 박힌 김사과의 '화'는 의미심장한 것이다. 저항하기보다 '무관심'해지고, 냉소적으로 바뀌었던 시대에서 그는 내면의 '화'를 지켜냈던 것이다. 그 응축됐던 감정들은 '글'이 되었고, 지금의 그를 만들었을 것이다. 『0 이하의 날들』에 담긴 산문들을 통해 그가 어떤 '소설'을 써왔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되기 시작했다.
김사과를 두고 "1980년대생 작가군에서 가장 개성적이고 문제적인 작가"라고 칭하는 건 어쩌면 당연해보였다. 문학평론가 양윤의 씨는 "2000년대 김사과의 출현은 단순히 그가 한국문학에 있어 희소한 캐릭터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넘어 새로운 정념의 표현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 평하기도 했다. 또, 문학평론가 김영찬은 "그간 한국문학에서 억압되어왔던 '분노 자본'의 폭력적 귀환이라고 일컬을 수도 있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경향신문>의 이영경 기자는 김사과 소설의 구성성분을 '분노 30%, 폭력 30%, 공포 20%, 자아분열적 광기 20%'라고 분석했는데, 이쯤하면 그의 소설들이 어떤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외 없이 극단적인 폭력'이 등장한다는 그의 소설들을 굳이 '찾아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김사과는 불편한 텍스트가 분명하다.
『0 이하의 날들』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작가가 대한민국의 현실을 '모멸감'이라는 시선으로 읽어낸 부분이다. 고등학교를 자퇴 하고 편의점에서 시급 천사백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했던 그는 고등학교 체육 선생이 '무너져내린 빌딩의 잔해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면서 '모멸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서로 모멸감을 주고받으며, 더 이상 모멸받지 않는 위치에 올라서기 위해서 애를 쓴다. 모멸받지 않으려고 공부하고, 성형수술을 하고, 대학에 간다. 모멸받지 않으려고 연애를 하고, 돈을 쓴다. 다들 그게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고 피곤해하고 치를 떨지면 도무지 그 게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다른 무엇만큼이나 자기가 속한 집단 내에서의 평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사회느 구성원에게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고,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움을 요청하느니 자살해버린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은 모멸 없는 삶이 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듯하다. 아니 모멸감 없이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 되어 버렸다.
타인의 모멸 섞은 눈초리에 반응하는 방식으로만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멸감을 통해서만이, 써바이벌 프로그램의 심사자나 독설을 늘어놓는 힐링멘토들처럼, 타인을 움직일 수 있다가 여기는 것을 결국 타인을 전혀 믿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런 식으로 쌓아올린 것이 위태로운 모래성이 아닐 리 없다. 거리에 늘어선 신식 건물들과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의 위태로운 표정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파도는 밀려온다. 우리는 어쩌다 나와 너, 우리를 믿지 못하게 되어버린 걸까?
이렇듯 '모멸감'으로 가득찬 삶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구토를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의 구토(구역질)는 '위태로운 실존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멀미'를 상징했고, 그건 '역겨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자아를 가진 인간다운 인간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지금의 구토는 그저 '식이장애 환자의 구토'일 뿐이라고 선을 긋는다.
'자본의 식욕은 한계가 없'지만, 인간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먹어치우고 토하는 것을 반복'하고 '토사물'을 만들어내는 '병'에 걸려있다. 결국 방법은 멈추는 것뿐인데, 김사과는 "세계 전체가 토사물에 휩쓸려버리기 전에, 아니 세계 전체가 거대한 토사물이 되기 전에, 최대치로 부풀어오른 자본의 욕망에 대해 그만, 이라고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당부한다.
스물 한 살에 등단했던, 자신과 세상에 대해 품었던 '화'를 '폭력'을 통해 거칠게 표현해냈던 소설가 김사과는 한국 문학의 첨단에 서 있는 '문제적 작가'다. 『0 이하의 날들』이라는 산문집을 통해 발견한 또래의 작가가 써왔던 소설들이 궁금해지는 동시에 앞으로 그가 어떤 작가로 거듭날지 귀추가 주목된다. 그건 제대로 '화'를 표출하지 못했던 나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 탓이기도 하고, 내가 되지 못한 어느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그에 대한 질투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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