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공간에 무수히 많은 시간이 흐른다. 시간은 공간 하나를 유심히 살핀다. 그곳이 어느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카페'의 창가 쪽 테이블이라면 어떨까. 먼지는 청소를 하는 주인의 손길에 매일마다 지워질 테지만, '이야기'는 시간만큼 차곡차곡 쌓여 나갈 것이다. 그 이야기를 타이핑 해서 얇은 A4용지에 옮겨 적어 둔다 하더라도 카페의 지붕을 뚫고 나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어쩌면 이미 달나라에 가 닿았을지 모를 일이다.

 

흐르는 건 시간뿐이라 그것만 변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시간이 스치고, 머물고, 할퀴고, 엉키고 지나가면 공간도 변한다. 아주 완연히, 그리고 현격히 변한다. 가끔 카페에 가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과 함께 있으므로 대화가 거의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앉아 있는, 혹은 항상 붐비는 저 창가 쪽 테이블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쌓여 있을까. 또, 어떤 이야기들이 머물다 갔을까. 어쩌면 저 테이블은 모든 걸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더 테이블>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 같은 영화인데, 하루라는 시간동안 어느 한 카페의 테이블에 쌓인 4개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 테이블은 어김없이 창가에 있고, 그 위에는 꽃이 들어 있는 작은 유리컵이 놓여 있다.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테이블이 분명하다. 간혹 창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가지만 결코 붐비진 않다. 카페의 분위기도 거리를 닮아 조용하고, 분위기가 있다. 카페 주인은 조용히 책을 읽으며 손님을 기다린다. 어쩌면 그도 귀를 쫑긋하며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첫 번째 이야기는 스타배우가 된 유진(정유미)과 전남친 창석(정준원)의 대화다. 재회의 첫 순간엔 묘한 설렘이 감돌지만, 금세 관계의 끝이 보인다. 눈치없는 창석은 급기야 유진에게 연예계의 낯뜨거운 루머들이 담긴 '찌라시'의 내용들을 캐묻기 시작하는데, 유진의 표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감정 변화가 흥미롭다. 두 번째는 과거 하룻밤을 보냈던 경진(정은채)과 민호(전성우)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만나 나누게 되는 대화다. 경진은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민호에게 화가 나 있고, 그 감정은 시선과 목소리를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다.


세 번째 이야기는 더욱 묘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결혼사기를 계획하고 있는 은희(한예리)는 결혼대행 업체를 통해 숙자(김혜옥)를 만난다. 은희의 역할은 숙자의 엄마인데, 두 사람은 완벽한 사기, 아니 결혼을 위해 입을 맞춘다. 네 번째 이야기는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남녀의 대화다. 다른 사람과 결혼을 앞둔 혜경(임수정)은 노골적으로 운철(연우진)의 마음을 떠보지만, 운철은 끝내 비겁한 태도로 일관한다. 헤어지기 직전, 그가 보여준 모습은 혜경에게 '최악의 하루'라 기억될 만큼 형편 없었다. 


 


정유미, 정은채 ,한예리 ,임수정 네 명의 배우는 각자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런닝타임에 70분에 불과하다) 속에서 극 속의 캐릭터를 설명할 뿐 아니라 자신의 매력도 분명히 표현한다. 이들이 작은 영화임에도 <더 테이블> 흔쾌히 출연을 결정했던 이유는 획일화된 한국영화 속에서 느꼈던 질식감 때문이었으리라. 최근 상영된, 그리고 상영되고 있는 한국영화들의 라인업을 살펴보라. 답답한 건 배우들만이 아니다.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했을 그들이 <더 테이블>의 시나리오를 지나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 김종관 감독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로 데뷔를 했던 정유미와 김 감독의 전작인 <최악의 하루>에 출연했던 한예리는 선택이 좀더 쉬었을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최악의 하루>에서 한예리가 맡았던 역의 이름도 '은희'였다.) 지금부턴 포스터에 나오는 네 명의 배우 말고 다른 배우 이야기를 해보자. 바로 김혜옥이다. <더 테이블> 속의 인물들은 '거짓'으로 스스로를 방어하고, 눈앞의 상대방을 속이려 든다. 하지만 그 거짓 속에 '진실'이 언뜻 보이고, 때로는 상대방에게 간파당한다.  

 

 

거짓이 난무하는 대화 속에서 '진심'이 우러나오는데, 그 조화가 가장 강렬하게 두러나는 이야기가 바로 세 번째, 그러니까 숙자와 은희의 대화다. 김종관 감독의 뮤즈로 떠오른 한예리의 연기도 훌륭하지만, 김혜옥의 그것은 순식간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감정을 움켜쥔다. 특히 은희로부터 어릴 적 집에서 불린 별명이 '거북이'였다는 말을 들은 숙자가 은희의 시부모 앞이라 가정하고 '딸을 잘 부탁한다'는 내용의 대사를 연습하는 장면은 여운이 길게 남는다.


1978년 연극배우로 무대에 데뷔하고, 1980년 MBC 특채 탤런트로 방송에 출연하기 시작한 김혜옥은 연기 인생 초반에는 그리 이름을 떨치지 못했다. 꾸준히 연기 활동을 이어왔지만, 주인공의 엄마를 비롯한 주변 인물을 맡아 스포트라이트에서 몇 걸음 비껴 있었다. 하지만 김혜옥은 자신만의 독특한 연기 스타일을 제한된 캐릭터 속에 녹여냈고, 시청자들에게 김혜옥만의 무언가를 꾸준히 각인시켰다. 가령, 엄마 역을 맡더라도 '푼수 같은 엄마', '엉뚱한 엄마'처럼 특화된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이런 차별화는 그의 가치를 높이는 전략이자 시청자들로부터 사랑받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김혜옥이 비로소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건 그의 나이 40대 후반 무렵인데, KBS2 <올드미스 다이어리>(2004~2006)에서 건망증 심한 셋째 할머니 역을 맡아 전환점을 마련했다. 여세를 몰아 영화 <가족의 탄생>(2006), <육혈포 강도단>(2010)에 출연해 스크린에서도 역량을 뽐냈다. 김혜옥의 진가가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 작품은 <내 딸 서영이>(2012)였는데, 서영이(이보영)의 시어머니 차지선 역을 맡아 시청률 47.6%를 기록하는 데 기여했다. 

 


MBC <투윅스>(2013)는 김혜옥의 연기력과 카리스마를 최대치로 뽑아냈던 작품이었다. 그가 맡은 역할은 악역이었지만, 평면적이지 않은 복잡한 캐릭터였다. 조서희는 겉으로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인기 정치인이지만, 실제로는 조폭과 결탁해 온갖 이권을 챙기는 탐욕적인 인물이었다. 김혜옥은 분노와 절제를 섞어가며 그동안 쉽사리 보지 못했던 여성 악역을 완성시켰다. 그 뒤로도 김혜옥은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는데, 2014년에는 <왔다! 장보리>로 대박을 터뜨렸고, 현재는 <황금빛 내 인생>에 출연 중이다. 

한예리는 김혜옥이 상대배우라 은희 역이 더 매력적이라 생각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그만큼 두 배우의 호흡은 기대 이상의 긴장감과 감동을 만들어냈다. <더 테이블>의 네 가지 이야기 중 남녀 관계가 셋이나 되는데, 그래서인지 은희와 숙자의 대화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더 테이블>은 개봉 11일 만인 지난 9월 3일 7만 관객까지 돌파했고, 9월 4일까지 73,333명을 동원했다. 이 작은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저력이 놀랍고 반갑기만 하다. 아마도 그 공은 포스터를 장식한 네 명의 배우와 숨겨진 히든 카드 김혜옥에게 돌려야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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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