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을 안 재우죠? 비인간적이잖아요."
"결백한 자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분노한다. 부당한 처사를 당했으니까. 그러다 고함을 치고 폭발하지. 반면 죄가 읶는 놈들은 풀이 죽고 조용해지지. 질질 짜기도 하고. 왜 잡혀왔는지 아니까. 자백받으려면 끝까지 몰아붙이는 게 가장 좋아."
동독의 비밀경찰 비즐러는 고문도 서슴지 않는 냉혈한이다. 잠을 재우지 않는 극단적 상황에 몰아넣어 자백을 받아낸다. 교육생들을 대상으로 효과적인 심문 기법을 강의하는 그는 사회주의 체제 수호의 첨병이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역할을 모범적으로 수행한다. 인간에 대한 악의를 지녔다기보다 주어진 책무를 수행할 뿐이다.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비즐러에게 인생의 변곡점이 나타난다. 반체제 극작가 드라이만과 배우 크리스타 커플을 감시하게 되면서 '균열'이 일어난다. 비즐리는 드라이만의 집 내부에 몰래 칩입해 도청 장치를 설치하고, 일거수일투족을 24시간 내내 들여다 본다. 작품 활동, 사상의 궤적은 물론 일상적인 대화, 심지어 성생활까지 모두 감시의 대상이다. 마치 유령처럼 드라이만 곁을 맴돈다.
감시의 대상인 드라이만의 변화가 감지된다. 체제와 적당히 타협하고 스타 작가로서 인기와 명예를 누며 살아가던 그는 권력에 의해 '블랙리스트'로 지목되어 생업을 잃은 동료 예술가 예르스카의 자살 소식에 격분한다. 그리고 안락한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 반체제적 선택을 한다. 원래의 비즐리라면 지체없이 윗선에 보고한 후 드라이만을 체포했겠지만, 더 이상 비즐리는 이전의 그가 아니다.
피감시자의 삶에 깊숙이 몰입하는 과정에서 시나브로 그 대상과 친밀해지고 어느덧 동화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피도 눈물도 없었던 비즐러는 이 같은 변화를 애써 부정하지만, 이미 흔들린 마음을 어찌하지 못한다. 비즐러는 '감시자'에서 '은밀한 보호자'가 된 것이다. 드라이만을 향한 권력의 압박은 점점 거세지고, 결국 비즐러는 그를 위해 자신을 위험 속에 내몬다.
2007년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수작 '타인의 삶'이 연극으로 제작되어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제2회 핑계고 시상식'이 열린 유튜브 '핑계고'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동휘는 눈물을 훔친 후 일정 때문에 먼저 자리를 떠났는데, 그 일정이란 바로 '연극' 공연이었다. 방송에서 제목이 직접 거론되지 않았지만, 바로 그 작품이 '타인의 삶(연출 손상규)'이다.
연극 '타인의 삶'은 동명의 영화에 기반한 작품으로, 기본적으로 영화의 전개를 그대로 따라간다. 영화를 이미 접했다면 스토리를 이해하기 수월할 텐데, 역시 관건은 비즐러(이동휘/윤나무)가 드라이만(정승길/김준한)을 도청하는 장면을 연극적으로 어떻게 표현했느냐이다. 영화 속에서 비즐러와 드라이만의 공간은 분리되어 있다. 비즐러는 청각만으로 드라이만의 일상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정된 공간을 사용하는 연극에서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면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기에 좀더 직관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비즐러가 마치 유령처럼 드라이만 주변을 떠돌며 관찰하고, 그림자처럼 밀착되어 살핀다. 더 나아가 비즐러는 감시 보고서 내용을 대사로 말하는 서술자의 역할도 수행한다. 그러다보니 비즐러가 드라이만에 동화되는 과정이 보다 실감나게 그려진다.
"아뇨. 이 책은 저를 위한 겁니다."
'타인의 삶'은 결국 비즐러의 변화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는데, 연극은 영화에 비해 그 감정 변화를 좀더 극적으로 담아낸다. 극의 후반부 첫 장에 'HGW XX/7에게'라고 쓰여 있는 빨간 표지의 책을 받아 품에 안은 비즐러 역의 이동휘는 아이처럼 눈물을 펑펑 쏟는다. 관객들도 시종일관 냉철했던 비즐러의 감정 분출에 따라 울 수밖에 없다. 감정의 동화는 관객에게도 이뤄진 지 오래다.
이동휘의 다재다능함은 익히 유명하지만, 그의 연기력은 주로 '코미디'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타인의 삶'을 통해 정극 연기를 선보이며, 그가 얼마나 기본기가 탄탄한 배우인지 입증했다. 첫 등장부터 깔끔한 딕션과 발성으로 관객을 몰입시키고, 군더더기 없는 연기를 펼치며 무대를 장악한다. 마지막 감정 연기도 넘침 없지만, 관객들의 감정을 파고들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동휘뿐만 아니라 정승길, 크리스타 역을 맡은 최희서 등 배우들의 열연도 매우 인상적이다. 무대 양편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대기하며 상황에 따라 유기적으로 연기하는 배우들의 동선도 매우 흥미롭다. 연극 '타인의 삶'은 LG 아트센터 서울에서 다음달 19일까지 상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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