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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하면서도 <흑기사>를 보게 만드는 배우 김래원의 힘

너의길을가라 2017. 12. 15.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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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서 아이스크림 먹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앞에 있는 남자 가슴이 뜁니다. 아무데서나 그러면 안 돼요. 위험합니다."


저 느끼한 대사를 어떤 이질감도 없이, 그것도 매우 달콤하게 소화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상대방의 화를 돋워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용인해 줄 사이가 아니라면 자제해야 할 말이다. 드라마라고 다를까. 엄청난 연기 내공을 가졌거나, 특별한 매력을 지니지 않았다면 쉽지 않은 대사다. 그런데 그 어려운 걸 김래원은 거뜬히 해냈다. 그리고 시청자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몰입시켰고, 설레게 했다. 어쩌면 '멜로 장인' 김래원이기 때문에 가능한 대사였는지도 모르겠다. 


SBS <닥터스>(2016)를 통해 일편단심의 로맨틱 연기를 선보였던 김래원은 잠시 무대를 스크린으로 옮겨 선굵은 연기로 관객들을 찾아왔다. 강렬한 눈빛과 휘몰아치는 연기를 펼쳤던 <프리즌>(2016)과 간결하고 절제된 연기로 깊은 울림을 줬던 <희생부활자>(2015)는 흥행 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김래원이라는 배우의 진가를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1년 만에 KBS2 <흑기사>라는 작품으로 시청자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달달했다. 아니, 더욱 달달했다.



"작품을 하는 동안 최대한 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현장에서는 연기를 하기보다 내 자체가 한 캐릭터가 되어, 캐릭터의 일생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김래원)


<흑기사>는 지독한 운명으로 얽힌 한 남자 문수호(김래원)와 두 여자 정해라(신세경) · 샤론(서지혜)의 250년에 걸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멜로가 중심축을 이루고 있지만, 사극과 판타지를 오가는 설정은 다소 부산스러울 수 있다. 더구나 판타지라는 장르가 매력적인 건 분명하지만, 섣불리 활용하면 가볍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김래원은 자신의 무게로 드라마를 지탱하며 안정감까지 주고 있다. <흑기사>라는 드라마의 '흑기사'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까. 


판타지 장르뿐만 아니라 사극 연기도 처음이라는 그가 이와 같은 단단함을 보여준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이해와 분석이 철저히 이뤄졌다는 방증이 아니겠는가. '작품을 하는 동안 최대한 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그의 연기 지론처럼, 김래원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연기를 한다'는 생각이 들기보다 자연스레 그 인물에 몰입이 된다. 어느새 시청자들은 어린 시절 불행을 딛고 성공한 사업가 문수호라는 캐릭터에 곧바로 감정 이입이 돼 버렸다. 또, 그의 사랑을 응원하게 됐다.



솔직히 KBS2 <흑기사>를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라 말하긴 어렵다. 사극과 판타지를 수시로 넘나들다보니 이야기의 전개가 원활하지 않고, 맥이 툭툭 끊어지는 느낌이 있다. 특히 캐릭터 설정이 아쉽다. 물론 제목에서부터 '흑기사'를 표방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성공한 완벽한 남성이 나타나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을 구원한다는 식의 발상은 불편하기까지 하다. 반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수혜를 입는 여성은 한결같이 굳세고 당당하게 그려진다. 


결국 '키다리 아저씨', '신데렐라'의 변형된 버전에 불과하다. 4회의 마지막 장면만 해도 그렇다. 세 가지 선물을 하려고 왔다는 수호는 해라에게 "옛날에 네가 살던 그 집, 내가 다시 찾아줄게. 그리고 어디가도 기죽지 않고 원하는 거 다 할 수 있는 생활, 그거 내가 하게 해줄게."라고 말하며 키스를 한다. 드라마적으로 볼 때는 아주 로맨틱하게 그려졌기 때문에 만족스러울 만한 장면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째서 해라가 '백마 탄 왕자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걸까. 


드라마에 대한 아쉬움이 있음에도, 캐릭터 설정에 대한 불만이 있음에도, 시청자를 홀리는 김래원의 연기는 이를 상쇄하고도 남는 힘을 발휘한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와 안정된 발성,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은 <흑기사>를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대사 한 마디를 허투루 버리지 않는 섬세한 표현력은 감탄을 자아낸다. 불평을 하면서도 그의 연기가 궁금해서 계속 보게 되는 식이다. '믿고 보는 김래원'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제작진의 입장에서도 신뢰가 가는 배우가 아닐 수 없다.



<흑기사>의 전략은 뚜렷해 보인다. 1, 2회에서는 슬로베이나의 풍경들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면, 3, 4회에서는 본격적으로 김래원의 매력을 앞세워 시청자들을 공략하고 나섰다. 여자 주인공들도 더할나위 없이 '예쁘게' 나온다. 정해라 역을 맡은 신세경은 솔직발랄한 캐릭터를 무난히 소화하고 있고, 샤론 역의 서지혜는 몽환적인 분위기로 판타지적 느낌을 만들어내는 한편 냉혹하면서도 처연한 연기를 완벽히 펼쳐나갔다. 늙지 않는 마녀 장백희 역의 장미희도 캐릭터의 맛을 잘 살렸다. 


주연 배우들의 활약 덕분에 <흑기사>는 수목 드라마 1위를 꿰찼다. 6.9%로 시작했던 시청률은 4회에선 9.1%를 기록했는데, 앞으로 두 자리 수 시청률을 노려볼 수 있게 됐다. <흑기사>의 선전은 역시 버팀목 역할을 한 김래원의 존재감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신세경의 다소 정돈되지 않은 연기도 김래원의 묵직함이 잘 보듬고 있고, 서지혜와의 애절한 인연도 김래원이라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야말로 열일하고 있는 중이다. "이번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다"는 그의 연기는 그래서 더욱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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