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암물질. 이를테면 비소, 석면, 벤젠, 카드뮴.. 이들은 대표적으로 암을 유발하는 요인이다. 이런 발암물질 저런 발암물질이 있지만, 그 중에 제일은 '스트레스'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접근하자면, 요즘 가장 '쎈' 발암요인은 JTBC <품위있는 그녀>의 품위 따위는 개나 줘버린 박복자, 바로 김선아가 아닐까? 워낙 캐릭터가 '강성'인 탓도 있지만, 이를 해석하고 풀어내는 배우의 역량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지나지 않을 터. 물 만난 고기마냥, 아껴뒀던 연기력을 쏟아내듯, 모든 걸 발산해내는 김선아는 그야말로 '소름'이다.
박복자는 간병인이다. 그는 안태동 회장(김용건)의 간병을 위해 고용된다. 둘째 며느리 우아진(김희선)은 똑부러지는 평소의 성격과는 달리 철저한 조사 없이 박복자를 집안에 들인다. 이 섣부른 선택은 결국 파국을 불러 오고 만다. 박복자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는 의도적으로 안 회장을 유혹한다. 자신의 육체적 매력과 다정함을 발휘한다거나 안 회장을 '환자'가 아닌 '남자'로 대하며 그의 숨겨진 욕망을 끄집어내는 야릇한 방법을 통해 원하는 바를 쟁취한다. 이에 홀라당 넘어간 안 회장은 박복자의 빚을 청산해주기에 이른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운명이 정해진다. 그 운명은 생각보다 너무 가혹한 나머지 순서와 등급이 정해져서 좀처럼 그 이동이 허락되지 않는다."
<품위 있는 그녀>는 대놓고 '계급 드라마'를 표방한다. 사람마다 순서와 등급이 정해지고, 그 이동이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다고 못박는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랑이 있을 터. 한 종류의 사람은 체념한 채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또 한 종류의 사람은 그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고자 할 것이다. 박복자는 전형적인 후자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 달려든다. 신분 이동을 위한 유일한 동아줄인 안 회장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는 누구보다 절실하다.
과연 박복자의 욕망은 충족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하류층'을 벗어나 저들만의 세상에 합류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1회의 첫 장면에서 처참히 살해 당한 박복자의 시신을 통해 그의 욕망이 끝내 '제거'됐음을 목도했다. 물론 드라마의 친절한 설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박복자로 대변되는 '상류층 합류'에 대한 욕망과 꿈이 헛되고 헛된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성벽을 둘러치듯 공고한 저들만의 세계는 결코 '아랫것'들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복자라는 존재로 인해 잠시나마 풍비박산났던 안태동 일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온을 되찾을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카르텔은 '보험 회사'가 돼 그들을 보호하리라. 굳건한 경제력은 그들의 삐끗했던 지위를 바로 세워 온전히 보전할 테고, 그 경제력이 보장하는 권위와 권력은 주위의 시선을 무력화시킬 것이다. 수군거림은 풍문처럼 흩어지고, 그들은 다시 '품위'를 내세우리라. 그것이 우스꽝스러우면 어떠하리. 우리는 여전히 '박복자'의 욕망을 벗어버리지 못하지 않았던가.
"절대 채워지지 않는 그것.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민낯을 드러낸 욕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멈추지 않는다. 가지지 못한 걸 가져야 하는 인간의 욕망. 우리 모두의 불행은 거기서 출발했다."
'정해진 결론'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품위있는 그녀>를 시청할 이유가 있을까. 물론 그렇다. 첫 번째 까닭은 바로 경악스러운 캐릭터 박복자로 분한 김선아의 물 오른 연기력이다. 그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와 서울말을 오가며 박복자의 능청스러움과 잔망스러움을 100% 표현하고 있는데, '역시 김선아!'라는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캐릭터에 몰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선아가 아니라면 누가 박복자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 대안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다만, 초반의 의뭉스러운 연기가 본색을 드러낸 지금보다 좀더 매력적이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박복자는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다. 언뜻 보기에 그는 "악으로 깡으로 덤비는" 그의 추진력은 가히 불도저를 연상케 하고, 야망을 이루기 위해 안 회장을 이용하는 악녀로 그려지고 있지만, 드라마는 박복자에 대한 평가를 최대한 유보하라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다. 가령, '우아진'에 대한 동정적인 시선이나 안 회장에게 명품 백을 선물받고 화장실에 가서 몰래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 등은 그에게 여린 마음이 내재돼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과거의 상처들과 현재의 고달픔이 그를 더욱 낭떠러지로 몰고 있는 것이리라.
한편, <품위있는 그녀>를 시청해야 할 두 번째 이유인 우아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안태동 일가의 실질적 안방마님인 우아진은 그 이름만큼이나 우아하고, 품위 있는 인물이다. 그는 첫째 며느리 박주미(서정연)와 대척점에 서 있고, 그가 어울리는 브런치 모임의 차기옥(유서진), 김효주(이희진), 오경희(정다혜)와도 다른 선상에 서 있다. 상류층에 속해 있지만, 허영심에 갇혀 있지 않은 캐릭터다. 다시 말해 '인간적인' 사모님이라 할까. 이성적이며 합리적이고, 차분하면서 사려깊다. 이런 '인간적인' 사모님, 우아진 역할을 김희선은 빈틈없이 채워냈다.
우아진의 세상은 흠집 하나 없이 완전했다. 시아버지를 지극한 효심으로 모시고, 남편 안재석(정성훈)을 물심양면으로 내조할 뿐 아니라 딸 지후(이매치)를 철두철미하게 뒷바라지한다.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잘못 들인 간병인 박복자로 인해 균열이 만들어지고, 남편의 불륜, 매력적인 남사친의 등장 등으로 그의 세계는 조금씩 깨져간다. 과연 이 위기 상황 속에서도 우아진은 자신의 '품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거침없는 연기를 선보이고 있는 김희선의 활약 여부도 관심시다.
"멈춰, 당신! 여기서 멈춰!"
"그녀의 말대로 그때 내가 멈췄더라면 난 지금은 살아 있었을까?"
익숙히 봐왔단 '막장' 구조를 답습하면서도 <품위 있는 그녀>가 독특할 수 있는 까닭은 아무래도 '캐릭터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박복자와 우아진의 대결은 그래서 흥미롭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지만, 그 과정의 독특함이 시청자들로 하여금 눈길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1회에서 2.044%(닐슨코리아 기준)였던 시청률은 상승세를 보이며 4회에는 3.285%까지 올랐다. 5회 방송에는 '윰블리' 정유미의 특별출연이 예고돼 있어 더욱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박복자라는 캐릭터가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강렬하게 '발암요인'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시청자들의 '응원'은 자연스레 우아진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는데, 이 휘청거리는 무게중심이 <품위있는 그녀>의 상승세를 저해하진 않을지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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