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미뇌뉘 선착장 -


이스탄불 여행기의 전반전이 끝났다. 지금까지 소개했던 곳들은 굳이 자유 여행이 아니더라도 '갈 수 있는 곳'이자 '가게 되는 곳'이다. 구시가지에 밀집한 주요 관광지들과 신시가지의 갈라타 탑, 돌마바흐체 궁전은 워낙 유명한 명소라서 패키지 여행의 필수 코스에 포함돼 있다. 달리 말하면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제법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아직 아야이리네 박물관, 예레바탄 사라이 등 구시가지에서 소개하고 싶은 곳이 몇 군데 남아 있지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제부터는 그 틀을 벗어나보기로 하자. 

자유 여행의 묘미는 '선택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잠깐동안 주어지는, 일정한 제한이 있는 옵셥이 아니라 완전한 선택권 말이다. 주체적인 권한이랄까. 쉽게 말하면 '내 마음대로' 쯤 될 것이다. 이미 일정과 숙소, 음식 등에서 그 권한을 제법 누렸지만, 장소적인 면에서 좀더 과감한 선택을 해보고 싶었다. 나는 그 선택권을 대중교통을 이용해 중심지로부터 제법 멀리 떨어진 곳을 다녀오는 데 쓰기로 했다. 그리하면 그 곳이 좀더 잘 보이고, 좀더 깊이 보인다. 이스탄불도 예외가 아니리라. 



그리하여 고른 곳이 바로 카리예 박물관(Kariye Museum)이다.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카리예 박물관은 구시가지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다. 드디어 베이스캠프를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모험심이 조금은 발현되는 듯 하다. 그때부터 여행이 좀더 생동감을 띤다. 선택을 하면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된다. 이동 수단은 무엇으로 할 건지, 돌아오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어느 정도일지, 인근 지역에 가볼 만한 곳이 더 있는지.. 이것이야말로 자유 여행이 주는 행복한 두통이다. 게다가 매우 중독적인 통증이다. 

카리예 박물관까지 가는 방법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에미뇌뉘(Eminönü)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 되는 간단한 이동 경로였다. 에미뇌뉘는 여행 기간 중 밤마다 들렀던 곳이라 익숙했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는 골든혼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에미뇌뉘는 두 곳을 연결하고 있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길다란 다리 아래에는 케밥 가게들이 즐비했고, 해협을 따라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인파의 북적거림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그 중의 한 명이 되는 일을 어찌 마다하겠는가. 


에미뇌뉘까진 트램(T1)을 타고 세 정거장만 이동하면 되니 어려울 게 없었다. 문제는 버스를 타는 일이었다. 지도를 보고 찾는데도 제법 헤맸다. 다리 아래로 들어가 지하의 통로를 돌아다닌 끝에야 버스 정류장을 찾을 수 있었다. 37E버스에 올랐다. '터키 하면 케밥? 진짜 명물 따로 있었네'라는 글에서 소개했던 구운 밤을 사서 버스에 올랐다. 외곽 지역으로 빠지는 버스라 승객 중에 관광객은 없는 듯 보였다. 현지인들로 가득한 공간, 그런 느낌을 좋다. 마침내 그들의 한 명이 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를 달렸을까. 에디르네카프(Edirnekapı)에서 하차했다. 핵심 관광 지역을 벗어나자 벌써 공기가 달랐다. 왠지 모를 상쾌함이 느껴졌다. 이제부터 약 5분이면 카리예 박물관이다. 목적지가 근거리에 있는 만큼 좀더 여유를 가지기로 했다. 이스탄불 거리와 사람들을 좀더 느긋하게 경험하고 싶어졌다. 일단, 슈퍼에서 콜라를 사서 마시고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골목길을 누비는 아이들이 보였다. '메르하바!'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쾌활한 웃음소리와 함께 인사가 돌아왔다. 아이들만이 줄 수 있는 그 천진난만함이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해줬다. 




카리예 박물관(Kariye Museum)
- 주소 : Dervişali Mahallesi, Kariye Cami Sk. No:8, 34087 Fatih/İstanbul, 터키
- 관람료 : 15TL(뮤지엄 패스 사용 가능)

코라 구세주 성당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카리예 박물관은 1081년 완공됐다. 건설 당시에는 동방 정교회 수도원 부속 교회였다고 한다. 14세기까지 증축과 개축이 반복됐다고 하는데, 여행을 하던 당시에도 외관 공사가 한창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발견하지 못한 채 지나칠 뻔 했다. '어라, 저긴가?' 여러 번의 의심 끝에야 그곳이 카리예 박물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어찌나 먼지가 올라오던지 건너편의 식당에서 피자를 먹는데 아주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카리예 박물관은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현관 역할을 하는 나르텍스(narthex)와 성당 내부, 보조 교회당인 파레클레시온(parecclesion)으로 구분된다. 내부에는 14세기에 제작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가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그리스도와 동정녀 마리아의 일생을 담아놓은 작품을 비롯해 예수의 12제자,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등도 묘사돼 있다. 가히 비잔틴 예술의 걸작이라 할 만 하다. 특히 신비로운 분위기와 어우러져 더욱 강인한 인상을 남긴다. 




성당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예쁨을 받지 못했고, 15세기에 다른 성당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교 사원으로 바뀌게 된다. 한편, 아이소피아 박물관의 모자이크들이 그랬듯, 카리예 박물관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들은 회칠로 가려지게 된다. 그러다가 1947년 미국의 비잔틴 연구소가 회칠을 벗기기 시작하면서 카리예 박물관의 수많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그래서 군데군데 훼손된 작품들이 눈에 띠어 보는 내내 안타까웠다.


한참을 머무르며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를 눈에 담았다. 관람객이 많지 않아 마치 전세를 내고 박물관을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동영상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멋들어지게 찍을 수 있었다. 서늘한 공간이 주는 쾌적함도 좋았다. 밖으로 나가면 또 다시 땡볕 더위와 전쟁을 벌어야 하니 말이다. 그렇게 환상적인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식당에서 피자로 배를 채운 뒤, 다시 이스탄불의 골목길을 이리저리 누볐다. 애초의 진짜 목적은 그것이었으니 말이다.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가 근처의 놀이터에서 엄마와 함께 놀고 있는 터키 소녀를 만났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는 말(을 알아들었을지 의문이다)에 밝은 미소로 응답했다. 수줍은 손짓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덩달아 웃음이 났다. 피로가 싹 가셨다. 누군가 여행을 왜 가느냐고 묻는다면 (여러 대답을 할 수 있겠지만) 바로 이 순간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짧지만 강렬한 교감 때문이라고 말이다. 낯선 여행자를 향해 건네는 아이들의 경계심 없는 밝은 미소 때문이라고 말이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