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5살 소년의 시선<룸>, 우리는 어떤 '룸'에 갇혀 있는가?

너의길을가라 2016. 3. 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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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아침부터 부랴부랴 준비를 마쳤다. 아침 8시 첫 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 영화의 첫 번째 관객이 되고 싶었다. 몇 번이나 눈물이 잔뜩 고였는지 모르겠다. 염려했던 것처럼 눈 앞의 자극을 좇는 데 매몰되지 않았고,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고 묵직했다. 물론 예상했던(?) 것처럼 영화관엔 혼자였다. 홀로 '룸'에 들어선 나는 그들의 <룸>을 마주했다. 



가로 3.5m, 세로 3.5m의 (작은) 방이 있다. 침대 하나, 옷장 하나, 세면대 하나, 변기 하나, TV 하나, 그리고 천장에 빛이 들어오는 창이 하나 있다. 그 곳에 24살 엄마 조이(브리 라슨)와 5살 아들 잭(제이콥 트렘블레이)가 단둘이 살고 있다. 아니, 사실은 갇혀 있다. 그 곳의 이름은 룸(room)이다. 아니, '세상'이다. 그들은 왜 그 곳에 갇히게 된 것일까? 그들을 그 곳에 가둔 사람은 누구일까? 여러가지 의문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보통의 영화라면, 당연히 떠올릴 법한 위의 질문들을 풀어내는 데 집중했을 것이다. '범죄'에 대해, '범죄자'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을 것이다. 어쩌면 영화의 분위기를 아예 '스릴러'로 몰고 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룸>은 위의 질문들에 무게 중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툭툭 답을 던진다. 오히려 (안팎의) '룸'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조이와 잭의 '삶'을 다룬다. 이 영화의 놀라움, 더 나아가 위대함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영화 포스터의 광고 카피처럼 '작은'을 그대로 적지 않고, 굳이 괄호 안에 집어넣은 까닭은 그 공간에서 태어나 5년이라는 기간을 살았던 잭에게 크고 작음이라는 상대적 개념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탈출' 후에 '방이 좁지 않았냐'는 질문에 잭은 '한 쪽으로 달리다 끝이 나오면 방향을 틀어 또 달리면 된다'고 천진난만하게 대답한다. 


잭에게 가로 3.5m, 세로 3.5m의 방은 그저 '세상'이고, '전부'다. TV 속에 나오는 모든 것들은 '가짜'일 뿐이다. 다섯 번째 생일을 맞은 아침 잭은 방 안의 '진짜'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넨다. "안녕 화분, 안녕 TV, 안녕 세면대…." 예쁘장한 얼굴에 머리카락까지 긴 잭은 얼핏 보면 여자아이 같지만, 5년 동안 머리를 자르지 않은 채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제서야 이해가 된다. 그리고 잭에게 머리는 성경의 삼손처럼 '힘샘'이다.



2009년 요제프 프리츨은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 


영화 <룸>은 엠마 도노휴의 동명 소설 『룸』을 원작으로 하고 있고, 소설 『룸』은 24년간 친아버지에 의해 지하 밀실에 갇혀 그의 아이를 낳았던 여성의 충격적이고 끔찍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물론 소설은 실화를 그대로 차용하지 않고 상당히 완화시켜 접근했고, 영화도 그러한 기조를 이어간다. 감금의 대상은 친아버지에서 모르는 남자로, 기간도 24년에서 7년으로, 아이도 7명이 아니라 한 명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실제 사건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오스트리아인 요제프 프리츨은 자신의 딸 엘리자베스를 특수 보안장치로 외부와 격리된 자신의 집 지하에 감금하고 성폭행을 해 7명의 자녀를 낳게 만들었다. 이 엽기적인 범죄가 발각된 건, 자녀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케르슈틴의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면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서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원작자(엠마 도노휴)가 영화 각본을 쓴 탓에 원작의 성격이 그대로 녹아 들었는데, 소설이 납치, 감금, 근친강간이라는 범죄 자체의 잔혹함보다는 '아이의 시선'을 통해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내고, 세상의 편견을 넘어서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간 엄마와 아들의 사랑과 유대 보여줬던 것처럼 영화 <룸>은 그런 원작의 관점을 잘 표현했다. 레니 에이브러햄슨의 감각적인 연출과 제88회 아카메디 여우주연성을 수상한 브리 라슨의 섬세한 연기, 그리고 무엇보다 아역 제이콥 트렘블레이의 놀라운 연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화는 조이와 잭이 물리적인 '룸' 안에서 억압된 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전반부와 물리적인 '룸'에서 탈출했지만 그들을 부정적으로 혹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룸'에 갇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그린 후반부로 나뉜다. 언론은 여전히 무감각하고, 그저 상업적이다. 피해자인 조이와 잭을 동물원의 동물 취급한다. 상처가 되는 질문도 서슴지 않는다. 그저 돈만 된다면!



가족들은 위로가 되지만, 반대로 상처가 된다. 결국 서로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건, 조이와 잭 두 사람의 깊은 유대다. 17살에 납치돼 룸에 갇혔던 조이와 처음부터 룸을 세상의 전부라고 알았던 잭, 두 사람에게 '룸'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갇는 공간이다. 조이에겐 탈출구가 없는 지옥 같은 곳이었을 테고, 잭에게는 '엄마'와 함께 있는 행복한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탈출'에 대한 생각도 다를 수밖에 없고, 탈출 후에 '진짜'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룸>은 그 차이를 또렷하게 과장 없이 보여준다. 처음에는 탈출에 대한 안도감과 가족을 다시 만난 기쁨을 느끼던 조이는 '편견'으로 가득 찬 세상을 목도하고 난 후 점차 폐쇄적으로 변하고, 처음 만난 세상에 낯섦을 느끼던 잭은 오히려 빠른 속도로 적응을 하기 시작한다. 



이때 손을 내미는 건 놀랍게도 아들 잭이다. 만약 <룸>이 섬세하지 못한, 일반적인 '어른'의 시선으로 그려졌다면, 이 영화가 지향하는 목표는 분명했을 것이다. 낯선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를 세상으로 이끌어내는 어른들의 구구절절한 노력 말이다. 혹은 거기까지 나아가지도 못한 채 '물리적인' 룸에 천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룸>은 오히려 물리적인 룸 너머의 또 다른 룸을 이야기하는 데 무게를 둔다. 또, 편견으로 가득찬 못난 어른들의 모습과 함께 어른의 상처들을 보여주고, 그것을 아이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치유의 방향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소설도 그렇지만) 영화가 천진난만한 5살 아이의 시선으로 그려진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영화관에 여러 영화들이 걸려 있지만, <룸>을 선택하는 당신의 선택도 신의 한 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정작 우리는 어떤 '룸'에 갇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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