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화, 수, 목, 금. 사람들은 매일 전쟁터와 지옥을 누빈다. '월요병'에 시달리고, '수요일'을 앞둔 시점에는 스트레스가 최고치에 도달한다. tvN <미생>은 “회사가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야”라고 했지만, 굳이 어느 쪽이 더 끔찍한지를 두고 ‘경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금요일 다음에 또 다시 ‘금요일’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직장인들과 '주말'이라는 개념이 애초에 없는 자영업자들에게 ‘주5일제’는 꿈만 같은 이야기이겠지만, 일반적으로 금요일 저녁은 ‘해방’이자 ‘휴식’과도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꿀’ 같은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저녁, 어떤 이들은 술집이 즐비한 ‘먹자골목’을 헤매며 일주일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고, 또 어떤 이들은 TV 앞에 앉아 분주했던 마음을 다독인다. 아마 후자의 방법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나영석 PD의 예능 프로그램들은 최고의 ‘힐링’ 친구일 것이다. <꽃보다> 시리즈를 통해 ‘여행’이라는 판타지를 충족시켰고, <삼시세끼> 시리즈에서는 ‘귀촌(歸村)’에 대한 로망을 자극했다. 이런 기본적인 주제 속에 ‘동물’과 ‘요리’라는 테마가 프로그램의 뼈와 살이 됐다.
시청률 면에서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신혼일기> 역시 기존의 프로그램들의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귀촌’을 바탕으로 동물과 요리가 끊임없이 등장해 시청자들의 눈을 ‘정화’시키고, 무엇보다 ‘안구 커플’이라는 ‘진짜’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며 ‘판타지’를 구체화시켰다. 제작진의 개입이 없는, PD 입장에서는 ‘거저먹는’ 프로그램으로 한 템포 쉬어갔던 나 PD가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이름하야 <윤식당>, 참으로 간결하고 명쾌한 타이틀이 아닐 수 없다.
인도네시아 발리의 인근 섬, 길리 트라왕간(Gili Trawangan)에서 윤여정과 이서진 그리고 새로운 얼굴 정유미가 ‘윤스 키친(Youn's Kitchen)‘이라는 이름의 한식당을 열었다. 직업이 ’배우‘인 이 세 사람은 당연히 식당을 운영한 경험이 없다. 음식을 조리하는 것부터 모든 게 서툴 수밖에 없다. 이원일 셰프와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홍석천에게 ’마더 소스‘를 전수받고 식당 관련 여러 노하우를 배웠다. 주 메뉴는 세 가지로 간소화했다. 불고기를 바탕으로 밥과 누들, 버거를 만드는 식이다.
준비를 마치고 현지에 도착한 <윤식당> 멤버들은 본격적인 장사에 돌입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대박’이 터졌다. 현재 여행객들은 윤식당의 불고기 맛에 반했고, 저마다 엄지손가락을 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정신없이 흘러갔던 하루, 일손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을 무렵에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이 회장 포스를 풍기며 등장한다. 바로 <꽃보다> 시리즈를 통해 나 PD와 인연을 맺었던 신구다. 그의 합류로 성비(性比)뿐만 아니라 나이에 있어서도 신구(新舊)의 조화가 이뤄진 <윤식당>은 비로소 완전체가 됐다.
6.215%에서 시작한 시청률은 어느덧 11.298%까지 상승해 동시간대 1위를 기록했다. ‘윤식당’ 1호점이 예정돼 있던 해변정리사업으로 철거되는 사태를 맞이하면서 멤버들의 ‘멘붕’이 그려지고, 2호점을 통해 재도약을 준비하는 과정이 담긴 3회는 최고 13.8%까지 치솟았다. 흥미로운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10대부터 50대까지 각 연령별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윤식당>의 다양한 시청자 층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만큼 다채로운 요소들이 프로그램 속에 녹아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대중의 ‘판타지’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해내는 나영석 PD의 영리함은 <윤식당>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시시때때로 카메라에 잡히는 발리의 아름다운 풍경들은 ‘여행’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고, 윤여정의 열정과 노력이 깃든 불고기 요리들은 ‘쿡방(먹방)’에 대한 시청자들의 접근을 용이하게 해준다. 이처럼 여행, 요리라는 기존의 요소에 ‘경영’이라는 포인트가 더해지자 쫄깃한 ‘긴장감’이 피어오른다. 남성 시청자들의 흡수는 여기에 기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뉴욕대 경영학과 출신의 이서진의 존재감은 어느 때보다 빛난다.
나영석 PD는 ‘나만의 가게를 갖고 싶다‘는 욕망, 혹은 자영업에 대한 대중들의 궁금증을 제대로 저격한다. 혹은 ’퇴직 후 자영업‘이라는 은퇴 공식을 떠올리게 한다. (식당의 사장이 이서진이 아니라 ’윤여정‘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연결고리를 더욱 강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물론 등 떠밀린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다.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그 ’고민‘이 <윤식당>에서는 참으로 예쁘게 그려진다. 실제로 OECD 2013년 통계를 살펴보면, 대한민국의 자영업 비율은 27.4%에 달한다. 이는 미국의 6.6%와 일본의 11.5%에 비해 현격히 높은 수치다.
(단지 자영업자들만의 책임으로 귀속시킬 수는 없겠지만) 제대로 된 준비나 철저한 시장 조사 없이 뛰어든 자영업자들의 성공률(생존률)은 당연히 낮을 수밖에 없다. 2004년부터 2013년까지의 집계 결과에 따르면, 창업은 949만 개, 폐업은 793만 개였는데, 생존률은 고작 16.4%에 불과했다. 참담하리만큼 낮은 비율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종편의 요상한 프로그램에 의해 직격탄을 맞아 순식간에 ‘골’로 갈 수도 있는 취약한 바탕 위에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윤식당>은 ‘예능’ 프로그램인 만큼 그런 치열함을 찾아볼 수 없다.
준비한 재료가 다 떨어지면 그쯤에서 장사를 접고, 손님이 기대만큼 찾지 않으면 남은 재료들로 저녁 식사를 해 먹는다. 손님들의 태도도 흥미롭다. 메뉴판을 받으면 느긋하게 꼼꼼하게 살핀다. 궁금한 게 있으면 주저 없이 질문을 하며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는 것을 즐긴다. 이서진은 신구가 손님들 앞에 계속해서 서 있자 “선생님 시간 좀 충분히 주시죠”라고 말하고, 신구는 “재촉하는 거 같아?”라고 웃으며 받아들인다. 나영석 PD의 ‘느림의 미학’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게다가 ‘발리’라는 여유로운 여행지가 주는 느낌과도 잘 부합한다.
물론 ‘사장’인 윤여정은 외진 곳에 위치한 ‘2호점’에 손님들이 잘 찾지 않자 “두 명이라도 왔으면 좋겠다”며 “장사하는 사람 심정이 이렇구나”라고 마음을 졸이지만, 그 애타는 심정의 본질은 준비한 재료들의 ‘아까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생계(生計)’가 빠져 있다. 시청자들이 나영석 PD가 구현한 ‘판타지’ 세계에 마음 편하게(심지어 행복하게) 몰입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아무런 시름 없이 마음 편히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무(無) 걱정'의 미학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이 90분 남짓한 시간의 ‘판타지’에 일주일 동안의 시달림을 조금이라도 떨쳐낼 수 있다면 ‘예능’으로서의 역할은 100% 수행한 것이 아닐까? "<윤식당>을 통해 시청자들이 쉴 틈 없이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지친 몸과 마음을 한 템포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느낄 수 있길 바란다"는 제작진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자. 또 한번 견뎌내야 할 '월화수목금'의 공포 뒤에 <윤식당>의 존재가 대중들에게 큰 위안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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