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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지 변질된 <전체관람가>, 결국 ‘열정 페이’만 남았다

너의길을가라 2017. 11. 16.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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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는 독립영화의 초석이다. 예능이라도 '독립영화의 초석이 되는 단편영화'라는 것을 잊지 않고, 예능과 영화가 서로 좋은 영향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문소리)

영화와 방송이 만났다. 아니, 정확한 '권력 관계'를 반영하자면 방송이 영화마저 품었다. JTBC <전체관람가>는 '예능'이라는 포맷을 통해 (단편) 영화가 제작되는 전 과정을 담아냈다. 방송을 통해 영화가 방영되는 수준을 뛰어넘어 기획과 캐스팅을 비롯해 촬영까지 그야말로 모든 속살이 공개되는 시대가 열린 셈이다. 제작진은 내로라하는 10명의 영화 감독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영화 제작에 관한 모든 과정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듯 자세히 담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미 방송은 그 괴물스러운 힘을 여러차례 보여줬기 때문이다. MBC <나는 가수다>를 떠올려보자. 기존에 시청자들은 음악 프로그램을 통해 '노래'를 들을 뿐이었지만, 이제 창작자의 '고통'까지 들여다 볼 수 있게 됐다. 완성된 노래 한 곡이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품이 들고, 노력이 요구되는지, 더불어 가수들이 무대에 서기 전에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떠는지도 알게 됐다. 그런가 하면 KBS2 <건반 위의 하이에나>는 작곡가들의 각기 다른 작업 방식을 보여주면서 '작곡의 세계'마저 속속들이 내보여주지 않았던가.

<전체관람가>는 콘텐츠로 인해 발생하는 수익을 독립영화 발전을 위해 지원한다는 취지를 내걸었다. (제작진은 수익금을 한국독립영화협회에 기부한다고 밝혔다.) 단편영화나 독립영화에 금전적 지원을 하는 동시에 그 성취에 대해 홀대받고 소외당하고 있는 독립영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집중시키려는 의도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이명세 감독,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의 이경미 감독, <상의원>의 이원석 감독,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 등 역량있는 감독들이 흔쾌히 참여를 결정한 까닭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닐 텐데, <전체관람가>에 출연하는 감독들의 다수는 여러가지 이유로 관객들을 만날 기회를 얻기 힘든 처지에 놓였다. 아픈 곳을 긁는 꼴이 됐지만, 그 이유들은 결국 하나로 수렴된다. 흥행 실패. 상업 영화의 세계에서 한번의 실패는 곧 죽음과도 같기에, 그들은 더 이상 창작의 기회를 부여받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해 있다. 그런 마당에 '제작비'를 지원하고, '인지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이처럼 <전체관람가>는 여러모로 긍정적인 구석이 많은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아무런 제한 없이 영화 제작을 맡길 리 없다. 이른바 ‘방송(예능)’의 틀 속에 영화를 집어넣는 작업이 따라왔다. <전체관람가>는 몇 가지 룰을 정했는데, 첫 번째는 배우 개런티를 포함해 제작비는 3,000만 원으로 제한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러닝 타임을 12분 내외로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소재인데, 2017년을 관통한 20개의 키워드(아재, 외모지상주의, 인공지능, 미니멀 라이프, 가상 현실, 데이트 폭력, 광장 등) 중 하나로 영화를 만들도록 주문했다. 역시 가장 첨예할 수밖에 없는 건 '제작비'였다.

제작비 상한선을 접한 감독들은 당장 우려를 표했다. 총대를 멘 이명세 감독은 "프리 프로덕션과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고려하면 턱없이 부족한 액수"라고 말했고, 봉만대 감독은 "여기 있는 감독님들이 저 예산을 보는 순간 딱 드는 생각이 뭐냐면, 다 사정을 해야 된다는 것"이라며 걱정했다. 아무리 12분 내외라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빠듯한 액수가 분명했다. 감독들이 계속 우는 소리를 내자 MC 문소리는 "3,000만 원에 맞게 아이템과 시나리오를 쓰셔서 너무 사정하지 않는 영화를 만드셔야 한다."고 딱 잘라 못박았다.

정윤철 감독의 <아빠의 검>, 봉만대 감독의 <양양>, 이원석 감독의 <랄라랜드>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작품들이 호평을 받으며 감독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웰컴투 동막골>, <조작된 도시>를 연출한 박광현 감독은 '단편 블록버스터 영화'를 제작할 거라면서 '히어로물' <거미맨>을 찍겠다고 밝혔다. <거미맨>에는 보조출연 포함 약 200명의 배우(찬스를 통해 제작진으로부터 보조 출연자 지원을 받았다), 스태프가 무려 70여 명이 투입됐다. 또, 억대의 장비인 카메라와 렌즈는 '구걸'로 협찬을 받아 진행됐다.

사실상 장편 영화에 맞먹는 장비가 투입됐는데, 이를 바라보는 다른 감독들도 입을 쩍 벌린 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광현 감독은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고, 좋은 취지를 강조하면서 다양한 지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개런티 없이 출연하는 배우뿐만 아니라 의상, 특수 분장, CG 심지어 밥차까지 ‘구걸’과 ‘사정’을 통해 이뤄졌다. 이는 곧 자발적 참여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했다. 감동스럽게 포장됐지만, 달리 보면 영화계의 열악한 제작 환경과 노동을 당위로 착취하는 그간의 영화계의 고질병을 보여주는 듯 했다.

방송의 성격상 예산에 한계를 두는 게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전체관람가>가 정한 가혹한 상한선이 착취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해 볼 부분이다. 도대체 허리띠를 졸라매는 예산 절감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 물론 제작진만 탓하기도 어렵다. 애초에 3,000만 원이라는 한계를 정했던 건, 문소리의 말처럼 그에 맞는 시나리오와 아이템을 가려 쓰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의 욕심은 끝이 없기 마련이고, 끝내 선을 넘고야 말았다.그걸 간과했던 게 잘못이라면 잘못일까.

박광현 감독은 제작비 3,000만 원이라는 룰을 ‘자발적 참여’라는 이름으로 가볍게 넘었고, <전체관람가>는 이를 ‘열정’과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포장했다. 박광현 감독의 봉인해제로 <전체관람가>의 룰은 무의미해졌다. 감독들은 ‘인맥’을 동원해 제작비의 부족을 채우기 시작할 테고, 영화계의 다양한 종사자들은 ‘열정 페이’를 강요당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좋은 취지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불합리한 관행이 개선되지 않고 답습, 재생산되는 데 일조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전체관람가>는 영화계의 열악한 제작 현장을 보여주는 데 그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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