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간 대한민국 여편네들 큰일이야. 남편은 밖에서 7천원짜리 밥 사먹으면서 하루 종일 일하는데, 집에서 펑펑 놀고 먹으면서 이런 데서 칼질이나 하고. 진짜 말세다. 말세야."
한숨부터 나온다. 가사 노동을 하찮은 것인마냥 생각하게 만드는 성차별적 언어다. 명백한 여성 혐오다. 그런데 이 참담한 문장이 지상파 드라마의 대사라는 게 믿겨 지는가. 벌써부터 놀라면 곤란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어디서 여자가 술 먹고 들어와서 고성방가야!" 술 먹고 귀가해 소리를 지르는 건 꼴보기 싫은 일이고, 충분히 지적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런데 '어디서 여자가'라는 단서를 붙일 이유가 있었을까?
"대를 못 이으니 이혼시켜야겠어요." SBS <아임 쏘리 강남구>
"안주인 되려면 식구들 끼니는 챙겨야지. 못하면 배워. 분만 뽀얗게 바르고 입술만 빨갛게 칠하고 있으면 되는 줄 아니" MBC <당신은 너무합니다>
"야, 남자가 깎으면 당도가 반으로 줄어든다는 연구결과 모르냐?" tvN <그녀는 거짓말을 너무 사랑해>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돈을 만나 이혼을 종용한다. 여성을 오직 출산의 수단으로 여기는 성차별 사례에 해당한다. 그런가 하면 예비 며느리에게 가사 노동을 강요하고 무조건적인 희생을 요구한다. 남자가 과일을 깎으면 당도가 줄어든다는 말은 '과일을 깎는 건 여성의 몫'이라는 성역할 고정관념을 드러내고 조장한다.
위의 어처구니 없는 대사와 장면들은 2017년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5월 1~7일까지 지상파 3사와 종편 1사, 케이블 1사의 시청률 상위 프로그램 22편을 대상으로 실시한 모니터링 결과다. 1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 혐오에 대한 문제제기가 잇달았고, 그 변화의 물결은 미투 운동으로 이어졌다.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 그 근간을 뒤흔든 미투 운동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조금이나마 나아졌을까? 당연히 그랬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정을 들여다보면 딱히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더 나빠졌다는 생각마저 든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은 지난 3월 1일부터 7일까지 지상파 3사를 비롯해 JTBC, TV조선, MBN, tvN 등 총 33개 프로그램을 모니터링했다. 그 결과 성차별적 내용을 담고 있는 장면이 무려 56건이나 발견됐다.
"가족의 아침을 여는 것은 엄마들의 몫" TV조선 <사랑은 아무나 하나>
"여자 3명 이상 모인 브런치 모임을 단속해야 해요" MBN <속풀이쇼 동치미>
"진짜 예쁜 관객들이 많이 왔으면 많이 웃겨 줘야지" tvN <코미디빅리그>
"아빠가 그랬잖아. 엄마 성격은 못 고친다, 내 돈으로 얼굴을 고치더라. 실리콘 3봉지는 들어갔을 거야 KBS2 개그콘서트>
그래도 위의 사례들은 듣는 즉시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경우들에 해당한다. 눈살이 찌푸려지고,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명확히 지적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직감한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론 일부(라고 믿고 싶은지 모르겠지만)의 사람들은 '저 정도 가지고 왜 그러냐'며 너무 예민하게 살지 말라고 말하거나, 이런 지적을 하는 이들을 '프로불편러'로 규정해 조롱하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틀렸다'는 확실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러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가 성 역할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외모 지상주의를 조장하고,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TV 속 내용들을 어느 정도 걸러낼 수 있는 수준까지 성숙됐다는 방증이다. 그런데도 TV는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성차별적인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다. 여전히 매우, 지독히 남성중심적이다.
KBS2 <라디오 로맨스>에서 톱스타 지수호(윤두준)가 막내 작가인 송그림(김소현)을 어깨에 들쳐 매고 걸어가 차에 태운다. 데려다 준다는 남성의 제안을 거절하자 돌발적인 행동을 취한 것이다. 납치라고 할 수 있는 폭력적 행동이지만, 드라마 속에서는 남자의 사랑으로 묘사된다. SBS <리턴>에서 강인호(박기웅)은 불륜의 대상인 염미정에게 "넌 변기야, 내가 싸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싸는 변기"라고 소리친다. 경악스러운 장면이었다.
로빈 월쇼는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에서 "대중문화는 남성의 공격성과 위력, 성을 혼합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확실히 우리의 대중문화는 거기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더욱 위험한 건, 위의 사례들과 달리 교묘하게 성차별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일지 모른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전혀 깨닫지 못한 채 흘러넘길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윤진아(손예진)와 서준희(정해인)의 달달한 연애를 보여준다. 연상의 여성과 연하의 남성이 그려가는 비밀연애가 설렘을 증폭시키고, 역경을 마주한 두 남녀의 진정한 사랑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윤진아와 서준희의 관계는 기존의 익숙한 젠더구도를 답습한다. 윤진아의 전 남친의 거듭된 젠더 폭력을 서준희가 '짠' 하고 나타나 해결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여성을 폭력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이 사적 관계의 남성이며, 여성을 두고 남자들끼리 힘겨루기를 하는 가부장적 구도가 반복"된다고 지적한다. 드라마는 윤진아를 남성의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그려 나가는 데 주력한다. 따라서 '애교', '순진성' 등이 강조된다. 여전히 남성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미성숙한 존재, 그것이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보여주는 여성의 모습이다.
tvN <나의 아저씨>는 어떠한가. 이지안(아이유)은 자신을 향해 무차별적 폭력을 행사하는 이광일(장기용)에게 "너 나 좋아하지?"라고 묻더니, 이번에는 박동훈(이선균)에게 "내 뒤통수 한 대만 때려줄래요?"라고 요구한다. 당황해 하는 박동훈에게 "그러니까 한 대만 때려달라고. 끝내게. 왜, 내가 끝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 좋아하나?"라고 소리친다. 끝내 뒤통수를 얻어맞고 길 위에 쓰러진다.
혹자들은 "극의 전개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한다. "긴 호흡으로 봐달라"고 애원한다. 그것이 캐릭터와 스토리 전개를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한 설정이라 하더라도, 폭력에 지나치게 둔감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여성 캐릭터가 매번 폭력에 쉽사리 노출되고, 심지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폭력을 선택하는 듯한 연출이 불가피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누가 봐도 명백히 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장면들을 걸러내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웰메이드라는 타이틀 아래, 영리하게 감춰져 있는 문제들을 지적하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간과하기 쉽다. 모른 척 하기 쉽다. 우리는 좀더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좀더 고민하고, 좀더 지적해야 한다. 설령 그리하여 '프로불편러'라고 불리더라 할지라도 말이다. TV 속 여성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세상 속 여성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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