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을 해도 정답에 근접할 수 없다고 느꼈다. 선택하는 모든 것이 오답이었고, 내가 선택한 것들로, 나는 선택받지 못하는 남자가 되어버렸다." (p. 34)
자신의 죽음을 계획한 청년 남성이 있다. 그는 <증명과 변명>의 저자 안희제의 오래된 친구 우진(가명)으로 "머지않은 시일 내에 조건부로 죽음을 계획해둔" 상태이다. 도대체 그는 왜 죽기로 한 걸까. 아니, 조건부란 또 무엇인가. 우진은 "자신이 원하는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면 죽음을 철회하기로 했"는데, 이를 자살 유예, 일명 '폭탄 목걸이'라고 명명한다.
갈수록 태산이다. 폭탄 목걸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긴급 구제'라는 기술에서 따온 것으로 캐릭터가 죽기 직전에 사용할 수 있고, 이 스킬을 사용 후 일정 시간 내에 적을 처치하면 살 기회를 한 번 더 얻게 된다. 우진은 폭탄 목걸이를 목에 걸고 '(이상형인 여자들의) 번호 따기'를 시작한다. 혹자는 고작 '번따'라고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겠다.
우진은 "죽기 전까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해보기로 했"다고 말한다. 여전히 우진이라는 청년 남성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 저자는 문화인류학, 사회학, 철학, 정신분석학 이론에 기대어 10년지기 친구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특히 퀴어 이론의 언어를 빌려 분석에 나선다.
우리는 망설임과 고뇌로 가득찬, 절실한 마음으로 질문을 던지는 저자를 통해 '오랫동안 우울과 강박에 시달리다 스스로에게 시한부 선고를 내리고 죽음을 계획한 20대 남성 우진'을 들여다봄으로써 '한국 사회가 구조화하는 전형적인 청년 남성의 삶을 그려내는 동시에 평범하게 살고자 했던 한 청년이 사회로 진입하며 어떻게 희망을 잃고 좌절해가는지 추적'할 수 있다.

"나는 한국 청년 남성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뻔하게 여겨지고, 동시에 청년 남성 본인들에게도 별다른 가치가 없다고 여겨진다는 바로 그 지점에 주목하고 싶다. 많은 청년 남성들은 자신의 삶을 우진이 "K-타임라인"이라고 표현한 '학교-수능-연애(=섹스)-군대-취업-결혼'의 틀 안에서만 설명하며, 그 이야기들은 기괴할 만큼 비슷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남성들에게는 서사가 없다." (p. 9)
청년 남성들에게 서사가 없다고 생각하는 저자는 이야기의 출발점에 '번따'를 둔다. 모태솔로인 우진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가 임하는 '번따'라는 실험의 전제에 "자기 자신이 성적으로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는 인식"이 있다는 걸 파악하고, "우진 자신의 성적 매력에 대한 체념이 우울로, 이 우울을 통제하기 위한 '번따'라는 강박이 여성의 비인격화"로 이어진다고 진단한다.
연애와 섹스에 포커스를 맞춘 채 출발하지만, 거기에서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못한 저자는 좀더 근원으로 들어가보려고 노력한다. "대화를 나누면서, 외모가 핵심이 아니라" "그의 열등감의 핵심에는 공부, 좀도 정확히는 성적, 아니, 더 정확히는 대학이 있"다는 걸 감지한 것이다. 이야기는 수능, 그리고 재수와 3수, 6수를 거치며 '와글와글' 증세를 겪는 시기로 이어진다.
우진과 같은 '와글와글' 증상, 그러니까 공황장애를 겪었던 저자는 "그가 자기 자신을 탓하게 만드는 생각에 가장 생생하고 가까운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그의 자기 비난을 강화하고 지금까지 계속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나일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우진에게 저자는 크론병 당사자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재수 후 연세대에 입학한 '초인의 존재'였다.
저자는 이대로 "우진의 폭탄 목걸이가 터진다면" "그의 죽음은 '입시에 실패한 모태솔로'라는, 소위 정상적인 생애경로에서 반복적으로 탈락한 '패배자'의 죽음으로 기사화될 것"이라 안타까워한다. 저자는 "연애, 수능, 주식은 사건의 지평선에서 포착되는 것들일 뿐" 우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 즉 청년 남성들의 삶을 관통하는 고갱이가 '증명'이라고 결론내린다.
왜냐하면 "우진에게 연애가 성적 매력에 대한 증명이었다면 수능은 '능력'에 대한 증명"이었고, 이후 그가 빠진 주식은 "수능에서 이루지 못한 그 증명을 이뤄재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위 SKY에 합류하지 못한 청년 남성들이 걷게 되는 소위 'K-타임라인'이라고 하는 한국적 생애주기의 한 단면일 것이다. 증명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사회가 그들의 목을 조여온다.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조문영의 말마따나 "'남성 청년'은 21세기 한국 사회의 불온한 이름"이다. 성적 착취와 폭력에 맞닿아 있다고 쉽사리 오해받는 그들은 스스로를 억압과 불평등의 표상으로 정의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가 하면 기성세대는 남성 청년을 이리저리 소환해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곳에 배치한다. <증명과 변명>은 이런 문법에서 적어도 몇 걸음 떨어져 있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추천사에 "읽으면서 감상이 수시로 달라졌다. 불편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내가 여기 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이라고 썼다. 그러면서 저자와 우진의 대화를 "부정의한 의리를 우정으로 포장하는 기존 남자들의 우정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우정"이라 규정하며 "글이라는 건 어쩌면 이래햐 하는" 것이라 감탄한다.
<증명과 변명>은 같은 세대의 페미니스트 남성 청년의 인류학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귀하고 의미있다. 저자는 'O장에 앞서', 'O장에 부쳐'에 지면을 할애해 자신의 휘두르는 글의 폭력성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애쓴다. 이 책을 통해 여전히 한국 사회의 불온한 이름인 '청년 남성'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