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책 36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19)

가부장제가 강제하는 성적 질서는 여성과 청소년들에게서 성적 자유를 박탈하는 대신 성을 상품화하고, 성적 관심을 경제적 예속의 대가로 만들어 버린다. 성은 억제되어야 하는 것이 되고 육체가 갖는 자연스런 욕망과 순수한 감각은 더러운 것으로 치부된다. 정숙함이 여성들이 지녀야 할 기본적 가치로 도입되면, 성적 욕구를 지닌 여성은 천박하고 가치 없는 존재가 된다고 라이히는 지적한다. 가부장제의 질서가 강하게 존속하는 한국에서 그 가부장들은 자신들의 얼니 딸들의 성교는 금지하나, 딸 또래 어린 여자들의 성은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소비한다. 여전히 우리는 라이히가 지적한 성적 질서의 악순환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목수정, 『야성의 사랑학』-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16)

'아직'에 절망할 때'이미를 보아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먼저 허리 굽혀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 내는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박노해, 「아직과 이미 사이」-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15)

그 전까지 나는 빛이 사람들의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된다고, 또 사람의 목소리는 사람의 몸보다 에너지를 더 멀리 전달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스물아홉 살이던 그 밤에 나는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민이 단결할 때 그들의 목소리는 빛보다 더 멀리 전달되고 그들 몸의 에너지가 그들의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되는 것이다. 마침내 나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위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14)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하는 것이다. 당신이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보면 그들은 제일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도무지 묻지를 않는다. 그들은 '그애 목소리는 어떻지? 그앤 무슨 놀이를 좋아하지? 나비를 수집하니?' 하고 묻는 법이 절대로 없다. '나이는 멋 살이지? 형제는 몇이고? 몸무게는? 아버지 수입은 얼마지?' 하고 물어 대는 것이다. - 생 텍쥐베리, 『어린왕자』-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13)

특별한 감상에 사로잡힌 건 아니다. 그리움을 느낀 것도 아니다. 만나고 싶은 얼굴을 떠올린 것도 아니다. 아무런 이벤트도 일어나지 않을 주말을 맞이하고,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건 오랫동안 질리도록 반복했다. 아무 데나 좋아, 모임만 있다면 어디라도 좋아.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 미야베 미유키, 『눈의 아이』-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11)

사람들은 대체로 너무 '잘' 쓰고 싶어서 글을 쓰지 못한다. 또한 실패에 대한 두려움, 성격적 결함, 배신의 상처, 용서가 안 되는 일, 치욕, 공포,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인 평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등의 '은폐된 비밀'을 들킬까 봐 글을 쓰지 못한다. "시간이 없다" "쓸 거리가 없다" 등등의 핑계는 오만과 두려움과 게으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글쓰기는 바로 자신의 삶에 진실한 얼굴로 다가서는 일이기에, 시간이 없고 귀찮고 재미없다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김별아, 『죽도록 사랑해도 괜찮아』-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10)

음식은 가장 높은 열에서 끓지만 끓을 때 익지 않는다. 끓고 나서 약한 불로 뜸을 들일 때 익는다. 과일은 한 여름 무더위에 몸통을 키우지만 맛을 내지는 못한다. 이끼에 수분이 줄어들고 땅이 입을 다물어 더 이상 물을 삼키지 않는 건조한 가을볕에 빛깔이 짙어지고 맛이 든다. - 이경자, 『딸아, 너는 절반의 실패도 하지 마라』-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08)

이쯤 되면 부족한 것은 정보가 아니라 관심이 되는 셈이다. 이제 값진 시그널과 단순한 소음을 분명하게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 파워를 갖게 된다. 그에 따라 선별하고 편집하는 사람이나 큐 사인을 내리는 사람들의 수요가 늘어나게 된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집중시킬 대상을 알려주는 사람에게는 이런 작업이 파워의 원천이 된다. - 조지프 나이, 『제국의 패러독스』-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07)

잔디가 자라는 속도, 정 많은 나무가 가을바람에 나뭇잎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는 속도, 그 똑같은 나무가 다부진 가지마다 이미 또 다른 봄을 준비하고 있는 속도, 아침마다 수영장 앞에서 만나 서로 눈인사를 주고 받는 하얀 강아지가 커가는 속도, 내 무릎 사이에 잠을 자고 있는 고양이가 늙어가는 속도, 부지런한 담쟁이가 기어이 담을 만나는 속도, 바람이 부는 속도, 그 바람에 강물이 반응하는 속도, 별이 떠오르는 속도, 달이 차고 기우는 속도 ……. 내 인생의 질문은 하나. 어떻게 하면 내가 그 속도에 편입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자동차가 가는 속도가 아니라 잔디가 자라는 속도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숨 쉬는 속도가 바닷가 파도치는 속도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 박웅현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05)

친구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 없는 바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세상 속에서 적 없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둘은 어떤 의미에서 또 어느 정도 상호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우리 친구의 자질을 평가하는 바로 그 편견 때문에 우리 적의 미덕을 공정히 판단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 로버트 파크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04)

문제들 그 자체를 사랑하려고 애써보세요,마치 그것이 밀폐된 방이나 낯선 말로 쓰인 책인 것처럼.지금 당장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당신은 그 문제들을 가지고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지금 그 해답을 얻을 수 없어요.그래서 모든 것을 살아보는 것이 중요해요.이제 그 문제를 가지고 살아보세요.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03)

결핍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만족은 욕망을 사라지게 만든다. 때로는 사랑도 이와 마찬가지다. 결핍과 권태를 오가는 이 슬픈 반복에 대해 앙드레 콩트-스퐁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결핍에 지배당하는 사랑은 극심한 고통이다. 그리고 더 이상 결핍에 지배당하지 않는 연인의 삶은 극심한 슬픔이다." - 카트린 메리앙, 『철학자에게 사랑을 묻다』-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01)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인생이란 놈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로 우리가 알게 앞통수를 치는 법은 없다고.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그러니 억울해 말라고. 어머니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니 다 별일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육십 인생을 산 어머니 말씀이고, 아직 너무도 젋은 우리는 모든 게 다 별일이다. 젠장. - 노희경, 노희경 대본집 《그들이 사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