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서재

현직 판사가 들려주는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너의길을가라 2024. 3. 2. 16:59
반응형

인공지능(AI)의 부상(浮上)으로 위태로운 직종 중 하나로 '판사'가 많이 언급된다. 실제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기보다 그만큼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낮다는 뜻이다. '한국리서치'의 조사(2020년)를 참고하면, 설문자의 66%는 '법원의 판결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대답했고, 인간 판사(39%)와 AI 판사(48%) 중 후자의 손을 들었다. 나라면 어떤 판사에게 재판을 받고 싶을까.

이러한 불신은 사법부가 자초했지만, 일개 판사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유독 분노하는 '판결'은 정치인 혹은 소위 가진 자들에 대한 것이다. 정치적 지형이 극단으로 갈린 상황에서 정치인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은 언제나 50점일 테고, 가진 자들의 변호인 물량 공세는 법원을 압도한다. 게다가 성범죄자의 형량에 대한 불만도 '앙형 기준'이라는 법의 한계에 기인한다.

"판사란 무엇이며, 판결이란 무엇인가?"

서울회생법원 판사이자 법학 박사 손호영은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에서 "재판은 진짜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판결도 하나의 '콘텐츠'"라고 설명한다. 판사는 "갈등의 종착지인 법정에 올 만큼 치열해진 당사자의 다툼"이라는 이야기를 숙고 끝에 자신의 언어로 정리한다. 그 결과물이 바로 '판결'이다. 즉, 판사의 '목소리'이자 판사가 고민한 과정과 결론을 담은 '그릇'인 셈이다.

저자가 딱딱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판결의 객원 해설, 그러니까 판사가 판결에 담아왔던 여러 노력들을 속속들이 알리는 역할을 자처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판결은 판사나 법률가의 전유물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단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판결을 "편하게 읽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할 것이기에 객원 해설로서 저자의 책임이 막중하다.

반응형


저자는 AI 판사에 대한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기도 한다. "판결의 속살을 이야기하기로 하면서, 사람 판사와 AI 판사의 차별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실제 사건과 판례 문장을 인용하며 판사가 어떤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어떤 고민을 했는지 설명한다. 이를 통해 '사람 판사'에 대한 신뢰를 제고(提高)하려 애쓴다. 그렇기 때문에 판결에 대한 비판보다 변호에 방점이 찍혀 있다.

책에는 '성전환자의 성별정정', '얼음 정수기 니켈 검출', 모다모다 샴푸, '양심적 병역 거부', '친부 성폭행' 등 실제 사건이 풍부하게 담겨 있고, 이와 관련한 법적인 쟁점 및 판사와 법원의 고민과 입장이 담겨 있다. 저자의 충실한 객원 해설을 따라가다보면 그런 사례들에 담긴 다양한 사회적 함의들을 이해하게 된다. 또, 판사로서 저자의 깊은 성찰도 엿볼 수 있다.

판결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난해한 법률 용어가 난무하고, 복잡하고 딱딱한 문장들은 읽기 거북하다. 저자는 판결에 대해 좀더 심리적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판사가 법정에서 가벼운 농담을 하거나 판결문에 '시적 언어'를 사용하는 일도 언급한다. 당연히 저자는 비유나 감정적 표현이 담긴 판결문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재판에서는 당사자들이 사건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도록 내어놓은 길이 여럿 나온다. 판사가 생각하는 또 다른 길도 있다. 판사로서 나는 그 갈림길에서 선택한 길이 올바르고 정당한 길이길 바란다. 이를 위해 내가 법, 판례, 이론, 실무만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사건의 모습과 구조, 법리의 적용 범위와 양상 등을 조감하고 통찰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p. 143)


손호영의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을 읽으면서 '모든 직업인이 손호영 판사와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추천사를 쓴 <슬픔의 방문>의 저자 장일호는 "페이지마다 자기 일에 대한 사랑과 책임, 자부와 두려움이 단정하게 깃들어 있"다고 썼는데, 만약 손호영과 같은 직업인들이 많아진다면 분명 우리 사회는 훨씬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저자는 이지리드(Easy-Read) 판결이 시도되고, 문장이 간결해지는 등을 언급하며 "지난 10년 동안 판결은 느리지만 차근차근 발전해 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10년은 판결에서뿐만 아니라 재판 과정에서도 판사가 더 당사자에게 다가가는 과정이 될 것 같"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그것이야말로 "'판사'와 '판결'의 본질에 더 가까워지는 과정"일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