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2달 살기를 통해 '무정형의 삶'을 만났다
"20년간 잘 다니던 회사를 떠나, 내가 도착한 곳은 20년 넘게 간직한 내 오랜 꿈이었다." (p. 4)
오래도록 한 도시를 사랑한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 무려 20년이다. '무정형의 삶'의 저자 김민철이 파리를 마음 속에 품은 채 살아왔던 세월 말이다. "다른 모양의 삶이 살고 싶"었던 저자는 "살던 대로 살아서는 다른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깨닫는다. 현실적인 이유로 미루고 미뤘던 오랜 꿈을 직시한다. 마침내 그는 20년간 일했던 광고대행사에 사표를 던지고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서 2달 살기.
이 짧은 설명만으로도 책을 구입하기에 충분했다. 상상의 회로를 열심히 돌려봐도 좀처럼 짐작이 되지 않았다. 파리에서 2달 동안 산다는 건 어떤 모양일까. 만약 나라면 파리라는 도시에서 어떤 형태의 삶을 찾고, 어떤 이야기를 써나갔을까. 파리에 3번이나 여행을 다녀왔지만, 충족되지 않는 아쉬움이 매번 짙게 남았다. 그럴 수밖에.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가고 싶고 보고 싶은 건 많았으니까.
여행의 구력이 조금 쌓인 후로 궁극적인 여행은 결국 '살기'로 귀결된다는 걸 알게 됐다. 짧은 시간에 스치듯 하는 여행은 머무르는 시간의 깊이를 이길 수 없다. 도시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 경험의 폭이 다르고, 태도의 결이 다르다. 그래서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파리에서 2달을 살고 온 사람이 있다는데, 그 귀인의 목소리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어차피 여행자는 오해로 단단히 무장한 사람. 자신이 본 한 장면으로 도시 전체를 오해하고, 자신이 겪은 한 사람으로 온나라 사람들을 단정 지어버리길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다." (p. 20)
저자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들었던 첫인상은 '호들갑스럽다'였다. 뭐, 저렇게까지 유난일까. 글자와 글자 사이에 저자의 흥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파리에 흠뻑 취해있는 저자의 격앙된 상태가 문자를 뛰어넘어 생생히 전달됐다. 파리로 2달 살기를 하러 떠난 저자가 부러웠던 걸까. 일종의 시기심이었을까. 처음에는 그 감정이 넘친다는 생각에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저자가 얼마나 파리라는 도시를 그리워했는지, 파리로 떠나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품고 있던 애틋함을 내가 단박에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차근차근 저자가 들려주는 파리살이 따라가보다니 그 심정이 조금씩 이해됐고, 저자의 다양하고 묵직한 삶의 고민들이 와닿았다.
저자의 파리 살기는 숙소에 따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뤽상부르 근처 부촌에서 지냈던 전반부는 여행의 설렘으로 가득하다. 한국에서 지인 2명이 차례로 방문하는 바람에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들로 복작복작하다. 유명한 관광 명소를 탐험하는 경험들로 가득하다. 저자는 본인의 성향대로 충실한 여행 가이드가 되어 완벽한 여행을 제공한다.
여행의 후반부는 파리의 외곽, 19구의 뷔트 쇼몽 공원 근처에서 펼쳐진다. 어떤 사람들은 위험하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현지인은 그곳이야말로 진짜 파리라고 할 수 있다면 느릿느릿하고 조용한 뤽상부르 공원 인근의 부촌보다 훨씬 재미있을 거라 추천한다. 과연 어땠을까. 놀랍게도 이때부터 저자의 파리는 풍성해진다. 단골 치즈 가게가 생기고, 즐겨 찾는 카페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어째서 제목이 '무정형의 삶'인지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다. 철저한 계획형인 저자는 한국에서의 일상과 마찬가지로 너무도 정형적인 하루를 살아낸다. 하루일과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마치 퀘스트를 깨듯 여행을 한다. 물론 어느 순간 여행은 우연의 산물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정처없이 골목을 누비지만 그 또한 정형의 한 모습일 뿐이다.
"결국 돈이 아니라 시간을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정적인 돈 대신 넘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24시간을 오롯이 내 마음대로 살며, 내가 어떤 모양으로 빚어지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너무 궁금해서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고정된 삶을 지키는 대신 무정형의 시간을 모험하고 싶다. 그렇다면 너무 모든 걸 정하지 않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목표 같은 건 당분간 잊는 건 어떨까. 40년 넘게 정해진 모양대로 살았는데, 앞으로의 모양도 정해져 있다면 조금 슬플 테니까. 무정형인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여, 찬찬히 나만의 하루를 완성해내고 싶다." (p. 313)
무언가를 보고, 무언가를 경험해야 한다는 강박이 정형의 삶을 압박한다.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저자의 고민이 명확히 드러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인다. "돈이 아니라 시간을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라는 저자의 깨달음은 깊은 울림을 줬다. "24시간을 오롯이 내 마음대로 살며, 내가 어떤 모양으로 빚어지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저자의 바람이 너무도 공감됐다.
저자는 말한다. 목표도 중요하지 않다. 잠시 뒤로 밀쳐두자. 고정된 삶을 지키기보다 무정형의 시간을 모험하자. 처음에는 혼란기를 겪겠지만, 찬찬히 완성해낸 나의 하루는 어떤 모양일지 궁금하지 않은가. "'한 여자가 20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파리로 두 달 여행을 떠났다.' 이 문장 뒤에 이어질 문장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마음이 움직인다면 '무정형의 삶'으로 들어와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