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뉴욕 여행기] 4. 점심 시간마다 뉴요커가 사랑하는 '브라이언트 파크'에 간 이유
"오늘 점심 식사는 어떻게 할까?"
"음, 'DIG'에서 샐러드 사서 브라이언트 파크 가자."
여행의 초반부 며칠은 평점 높은 유명 식당들을 열심히 찾아 다녔다. 미리 알아뒀던 뉴욕 맛집 리스트가 있었고, 예약한 일정에 따라 움직였다. 브루클린의 전통 있는 피자집 '그리말디스', 태국의 맛을 완벽히 재현한 'Mitr Thai Restaurant', 소호(SOHO) 사람들도 인정한 지중해 식당 '슈카', 'Eage' 전망대에 있는 레스토랑 'Eage Peak Restaurant'에서 근사한 한 끼 식사를 즐겼다.
매 끼마다 10만 원이 훌쩍 넘는 밥값이 들었다. 뉴욕의 물가는 가히 살인적이라 할 만한데, 기본적으로 메뉴 하나가 약 3만 원 안팎이었다. 거기에 기본 20%의 팁까지 줘야 해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면 그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 (여기에서 제대로 식사를 했다는 건 음식을 3개씩 주문했다는 얘기다.) 뉴스로만 듣던 뉴욕의 물가와 '팁플레이션'을 체감할 수 있었다.
여행객으로서 며칠 지내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뉴요커들은 어디에서 점심을 먹고, 무엇을 먹을까. 궁금증이 생기니 관찰을 하게 됐다. 많은 뉴요커들은 점심 시간이 되면 정체불명의 '종이 트레이'를 손에 들고 이동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빌딩 외부에 마련되어 있는 휴식 공간이나 뉴욕 도심 곳곳에 조성된 공원이었다. 혼자 또는 삼삼오오 모인 뉴요커들은 벤치에 자리 잡았다.
그들이 들고 온 종이 트레이에는 다양한 채소로 구성된 '샐러드'가 담겨 있었는데, 집에서 싸온 도시락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의 동선을 좀더 추적해 보니 'sweetgreen'이나 'DIG' 같은 곳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그제서야 요즘 뉴욕에서 샐러드로 식사를 대체하는 게 유행이라는 얘기가 떠올랐다. 간편하기도 하고 건강에도 좋기 때문일 텐데, 높은 물가도 한몫했으리라.
뉴욕의 공원하면 대부분 '센트럴 파크'를 연상할 것이다. 물론 (앞선 글에서도 썼듯이) 센트럴 파크의 압도적인 크기와 그곳이 주는 안락함은 더할나위 없었다. 십 미도우의 구석에 돗자리를 깔고 즐기는 여유로운 시간은 비현실적었고, 그만큼 행복했다. 하지만 뉴욕 여행 중 가장 좋았던 공원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고민 없이 '브라이언트 파크(Bryant Park)'를 꼽겠다.
보자르(Beaux-Arts) 양식으로 건축된 뉴욕 공립 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을 방문한 김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브라이언트 파크에 들렀는데 그 특별함에 푹 빠져 버렸다. 센트럴 파크와 달리 도심의 중심에 위치한 브라이언트 파크는 맨해튼의 거대한 빌딩 숲 사이에 숨겨진 보물 창고처럼 다가온다. 공원 안쪽으로 진입하면 또 다른 세상으로 진입한 듯한 들뜬 설렘을 준다.
뉴욕에 대한 첫인상은 아무래도 빌딩인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경쟁적으로 솟아있는 수많은 빌딩들이 직관적으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다채로운 건물들이 자아내는 풍경이 놀랍고 아름다워서 탄성을 자아내지만, 시간이 경과하면 점차 익숙해져서 답답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빌딩들은 빈틈 하나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거리에 사람들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사방으로 뻗은 격자형 도로가 시야를 일정 부분 보장해 주지만, 꽉 찬 공간이 주는 숨막힘은 어쩔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공원은 뉴요커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공간이다. 인공호흡기에 비유하면 지나친 과장일까.그런데 뉴욕 도심에는 워싱턴 스퀴어 파크, 유니언 스퀘어 파크, 매디슨 스퀘어 파크 등 공원이 많은데, 왜 브라이언트 파크를 가장 좋아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센트럴 파크의 축소판. 이렇게 그냥 비워진 공원이 오히려 사람들의 행태를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것 같다. 정해지지 않은 공간적 불명확함이 만들어 내는 행태가 브라이언트 파크의 진짜 매력이 아닐까?" 이용민, <뉴욕, 기억의 도시>, p. 128
브라이언트 파크가 특별한 이유는 차별성 때문이다. 뉴욕 도심의 다른 공원들은 기존적으로 질서정연하다. 우리가 흔히 공원을 상상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전형적 모습이다. 분수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벤치들가 놓여 있고, 식재, 조경이 유려하게 꾸며져 있다. 하지만 브라이언트 파크의 한가운데에는 직사각형의 잔디밭이 깔려 있고, 그 주변에 있는 벤치도 대부분 이동식이다.
브라이언트 파크에 발을 내딛는 순간, 복잡한 도심에서 벗어나는 듯한 자유를 느끼게 된다. 공원 내 벤치에 앉아서 잔디밭을 바라보면 돗자리에 앉아 책을 읽거나 누워서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매트를 깔고 요가를 하는 이들도 제법 눈에 띤다. "정해지지 않은 공간적 불명확함"이 사람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하고, 그 자유로움이 다양한 행동을 자아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뉴욕 여행을 하는 2주 동안 가장 많이 찾았던 곳은 브라이언트 파크이다. 저마다 샐러드나 햄버거 등 먹을거리를 챙겨서 그곳을 찾는 뉴요커들처럼, 점심 시간이 되면 브라이언트 공원에서 머물렀다. 공원 인근의 'DIG'에서 샐러드를 사서 잔디밭 근처 벤치에 자리잡았다. 가격도 15달러 안팎으로 부담이 적었다. 식사가 끝난 후에는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며 여유를 만끽했다.
센트럴 파크가 도심과 완벽히 분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워낙 공간이 넓어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조차 하나의 배경처럼 느껴진다면, 브라이언트 파크는 도심에 접해 있고, 사람들과의 거리도 눈인사를 건넬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서 공간이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어찌보면 삭막할 수 있는 빌딩 숲 속에 이런 휴식 공간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뉴요커들이 왜 공원으로 향하는지 알 듯했다.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다거나 놀라운 볼거리가 있었던 게 아님에도, 뉴욕을 떠올리면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많이 생각난다. 점심으로 먹는 샐러드는 맛있었고, 벤치에서 즐기는 쉼은 달콤했고, 푸른 잔디밭 너머, 빌딩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사랑스러웠다. 나는 뉴욕의 공원에서 잠시나마 뉴요커가 되었고, 그 스며듦이 여행의 전부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