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다가오는 총선, 정치의 실종 앞에 '어른 김장하'가 아른거린다

너의길을가라 2024. 3. 16.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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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드라마에서 '좋은 정치인'의 표본을 찾아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영화 '아수라'의 박성배(황정민)는 안남시 만악의 근원인데, 시장직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조폭'과 다름없다. 선거판의 추악한 이면을 담은 영화 '특별시민'에는 '권력'을 추종하는 하이에나들이 득실댄다. 3선 서울시장을 노리는 변종구(최민식)는 자신의 불법을 덮는 등 악랄한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비밀은 없다'에서 국회 입성을 앞둔 TV 앵커 김종찬(김주혁)은 자신의 불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한다. 국회의원 배지를 얻기 위한 그의 폭주는 최악의 결말로 귀결된다. 드라마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인은 뇌물, 비리와 동일어처럼 그려진다. 넷플릭스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를 보면 '정치의 본질이 협작이었나?'라는 회의감마저 든다.

그렇다고 영화나 드라마를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째서 좋은 정치인을 담아내려고 노력하지 않지?'라고 따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대중매체는 언제나 현실을 충실히 반영할 뿐이다. 잘못은 오히려 정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정치 현실이 영화보다 영화 같고, 드라마보다 드라마 같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당연히 좋은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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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총선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저마다 표를 달라고 성화인데, 선뜻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고, 국민의 삶을 지키고자하는 모습이 온데간데 없기 때문이다. 양쪽으로 찢어져 서로의 불법과 부정을 힐난하고, 서로의 무능을 비판하고, 서로의 막말을 지적한다. 역시 영화나 드라마 속의 정치인들과 다를 게 없다. 정치인은 넘쳐나는데 정치는 실종된 듯하다.

사라진 게 또 있다. '어른'의 부재이다. 물론 생물학적인 나이로만 따지면, 다음 국회는 좀더(?) 어른들로 가득찰 전망이다. 공천이 확정된 여야 후보들의 평균 나이가 57.8세로 집계됐기 때문이다. 이는 21대 총선의 54.8세에 비해 3살 많아진 숫자이다. 다만, 저들 중에서 시대의 '어른'으로 존경할 만한 정치인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뿌려 버리면 거름이 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눠야 사회에 꽃이 핀다." (김장하)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좋은 정치인'을 찾기 힘든 요즘, '어떤 사람이 우리 사회의 리더였으면 좋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가 떠올랐다. '좋은 사람' 혹은 '좋은 어른'을 연상하면 눈앞에 당장 아른거리는 이름이다. 경남 진주의 어느 한약방을 60년 동안 운영한 김장하 선생은 수백 억에 달하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20대 젊은 시절부터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남물래 장학금을 줬는데, 지금까지 그 숫자가 1000명을 넘는다. 또, 시민사회, 문화예술, 교욱 분야를 넘나들며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자처했다.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건, 김장하 선생은 한 번도 돈 앞에 자신을 앞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평생에 걸쳐 대가 없는 나눔과 간섭 없는 지원을 실천한 어른이라 할 수 있다.

평생 자가용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던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에 종사하면서 내가 번 돈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기 때문에 내 자신을 위해 써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한 평생을 살아왔는지 조금이나마 알 듯하다. 국민의 세금을 허투루 쓰는 지금의 정치인들과 완전히 딴판이다.

김장하 선생의 삶은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사재를 털어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했던 그는 이사장으로 재직 당시 정부의 외압으로부터 구성원들을 지켜냈다.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묵묵히 지원하고, 자신의 자리에 단정히 머물며 맡은 역할을 묵연히 이행했다. 불의에 맞서 싸웠고 물러서지 않았다. 위법을 행하지도 않았고, 편법과 타협하지 않았다.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평생 지키고 살았다.

'좋은 어른' 김장하 선생이라면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김장하 선생은 정치인도 아니고, 그의 성향상 정치에 기웃거릴 사람도 아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장하 선생을 50분간 만난 후 "참 좋은 분을 만났네. 정치인을 만나 훈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라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 김장하 선생 같은 어른의 존재가 귀하고 소중하다.

안타깝지만 지금의 정치판은 너무 오염되어 김장하 선생 같은 사람을 품기 어려워졌다. 대쪽같이 신념을 지키는 사람이 다가가기 힘든 곳이 되었다. 한국 정치의 비극이다. 그럼에도 훌륭한 정치를 하기 위해 뜻을 품은 정치인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을 것이다. '어른' 김장하 선생이 쏘아 올린 수많은 씨앗들이 한국 사회 곳곳에 퍼져 나간다면 좀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이번 총선에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진영 논리에 빠져 내편 네편 가리는 데 몰두하지 말고, '김장하 닮은꼴 찾기'에 힘을 쏟았으면 좋겠다. 물론 쉽지 않은 미션이 되겠지만, 그런 유권자의 노력이 좋은 정치를 만들고, 좋은 정치인을 길러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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