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조작된 도시>, 누가 그들을 썩은 나무라고 했는가

너의길을가라 2017. 2. 18.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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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가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나지막하면서도 단호한 내레이션,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천상병 시인의 <나무>라는 시다. 사람들이 '썩은 나무'라고 했던 그 나무가 사실 무한한 생명력을 내재한 존재였고, 꿈 속에서 그 잠재성을 발견한 '나'는 다시 사람들을 모아 이렇게 외친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흘러나오는 '썩은 나무' 타령에 처음에는 '뭐? 무슨 말이야?'라는 의문이 들 법 한데, 영화의 서사를 따라가다보면 첫 장면의 내레이션이 담고 있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다시 읊어지는 저 시를 마주한 관객들은 '맞아, 썩은 나무가 아니야'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천상병의 <나무>는 영화 <조작된 도시>를 꿰뚫는 주제 의식을 담고 있다. 어찌보면, <조작된 도시>가 천상병의 <나무>라는 시에 대한 '재해석'이라 여기지기도 한다. 그만큼 두 '작품'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단순히 '썩은 나무'의 재조명을 넘어 어떤 존재를 '썩은 나무'라고 '규정'짓는 '닫힌' 사회적 시선, 그리고 그 시선을 뒤집기 위해선 또 다시 '사람을 모아'야 함을 보여준다. 


영화는 게임과 현실을 넘나든다. 마치 <나무> 속의 '나'가 ''꿈'을 꾸듯이. 권유(지창욱)는 게임의 세계에서는 팀원들을 이끌고 전투를 진두지휘하는 리더 '권대장'이지만, 현실에서는 그저 백수에다 'PC방 죽돌이'에 지나지 않는다. 3만 원이 없어서 정모에 참석도 할 수 없는 처지, 그러니까 '썩은 나무'라 할 만 하다. 그의 팀원들은 어떠한가. 데몰리션(안재홍)은 특수효과 회사의 말단 스태프이고, 용도사(김민교)는 용산 전자상가 출신 이른바 '용팔이'다. 여백의 미(김기천)는 지방대 교수인데, 게임 속 그들의 멋진 캐릭터와 현실의 모습이 사뭇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현실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썩은 나무'인 셈이다. 한편,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또 다른 팀원 은폐(김슬기)와 엄폐(심원철)는 성인 인터넷 방송 VJ와 감독으로 우리 사회의 비주류 중의 비주류라 할 수 있다. 또, 가장 도드라지는 캐릭터인 '털보형님' 여울(심은경)은 천재적인 해커 실력을 자랑하지만, '메시지'로 대화를 해야 할 만큼 심각한 대인기피증이 있어 현실에선 부적응자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게임 속에서 맺어진 인연을 바탕으로 '의리'를 발휘해 누명을 쓴 '권대장' 권유를 물신양면으로 돕는다. 살인범으로 몰려 그 누구도 도와주려 하지 않는 권유를 돕기 위해 한자리에 모이는 팀원들의 '정체(?)'가 밝혀지는 장면들은 웃음을 주는데, 이들이 힘을 모아 권유의 억울함을 해소시키는 과정은 묘한 쾌감을 준다. '썩은 나무', 다시 말해서 사회적으로 '루저'라고 규정된 어떤 존재들이 현실의 '질서'를 뒤집고, 기득권의 오만함에 한방 먹이는 그 유쾌한 반란이 주는 카타르시스라고 할까.



'정보'를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졌다고 했던가. 어느덧 정보는 권력이 됐다. CCTV, 신용카드 등을 통해 개인 정보가 자동적으로 수집되고, SNS 등을 통해 자발적으로 개인 정보를 공개하는 사회에서 '감시'와 '통제'는 더욱 쉬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민천상(오정세)은 '21세기 빅브라더'이다. 자신의 서버에 온갖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 사건을 '은폐'하기도 하고 '조작'하기도 한다. 그의 기획에 따라 전문가 · 언론 등이 움직이고, 여론은 신명나는 춤을 춘다. 그 과정이 등골이 서늘할 정도다. 


소위 기득권자들이 범죄를 저지른 후 '의뢰'를 하면, 민천상은 시나리오를 짜고 그럴듯한(!) 범죄자를 선택한다. 권유처럼 게임에 빠져 PC방을 전전하는 백수라면 '땡큐'다.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면 사람들은 흔쾌히 수긍을 하기 때문이다. 또, 사회적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성매매 여성은 좋은 먹잇감이다. 그가 톱스타에 대한 집착으로 엽기적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면 세상은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니까.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를 더하자면, 민천상이 '인권 변호사'라는 탈을 쓰고 있다는 설정이다.



은폐된 진실, 조작된 증거, 여기에 가담한 언론.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몰린 권유와 그의 팀원들은 이 공고한 '세상'에 기꺼이 맞서 싸운다. 그 '전투'는 무모해 보이지만, 그들은 조금씩 '조작된 도시'에 균열을 내고, 끝내 그 거짓된 세상을 박살내고야 만다. 특히 이들이 '진실과 거리가 먼' 방송국을 배경으로 마지막 활극을 벌이고, '권력의 언어를 고스란히 읽는' 앵커를 향해 돌진하고, 결국에는 성인 인터넷 방송의 은폐와 엄폐가 '진실을 담은' 뉴스를 전국에 생중계하는 장면은 눈과 귀를 닫은 이 시대의 언론에 경종을 울린다. 


누군가가 처음 그들을 향해 '썩은 나무'라고 불렀고, 사람들은 덩달아 그들을 '썩은 나무'라고 믿었다. 하지만 <조작된 도시>는 그 시선과 생각들이 '조작'된 것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짜를 알아챌 수 있는 '안목'인지도 모르겠다. 또는, 기득권이 만들고 주입시킨 딱딱한 틀을 벗어날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뿐일까. 아니다.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바로,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 말이다. 외칠 준비가 됐는가.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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