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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사판>이 그리고 싶었던 게 '이판사판'은 아닐 텐데

너의길을가라 2017. 11. 25.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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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판사(법관)'라는 직업은 법정 드라마(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외면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당연히 역할의 비중도 적었다. 혹시 최근에 봤던 법정 드라마 중에서 기억에 남는 '판사'의 얼굴이 있는가. 대부분 떠오르지 않거나 기억나더라도 희미할 텐데, 실제로 법정 드라마에서 판사 역할은 유명하지 않은 중견 배우가 맡거나 그도 아니면 무명 배우가 맡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어차피 주인공은 검사 아니면 변호사였을 테고, 그저 "정숙하세요!" 정도의 대사만 하면 됐을 테니 말이다.


사건의 해결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적극적인 주체로 활동할 수 있는 검사나 변호사에 초점이 맞춰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차피 사법부의 판단은 검사와 변호사가 열심히 채집한 증거에 따라 '객관적으로' 내려지는 것이라는 '믿음'도 한몫 했을지 모르겠다. 검사와 변호사 중에서 보다 유능한 쪽의 승리를 '승인'하는 정도의 존재감밖에 갖지 못했다. 하지만 '자유심증주의'라는 엄청난 권한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임을 알 수 있다. 법정에 가보면 알겠지만, 그 구역의 갑은 역시 판사다.



SBS의 새로운 수목 드라마 <이판사판>은 두 가지 이유에서 기대를 모았던 드라마다. 첫 번째는 처음으로 판사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였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박은빈이라는 배우가 출연했기 때문이었다. 대중매체에서 이상하리만치 소비되지 않았던 판사라는 직업에 대한 이해를 돕는 동시에 법정 드라마를 새로운 관점에서감상하는 포인트를 제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기존의 기계적 중립자 위치에서 벗어난 그들만의 좀더 생생한 세계를 엿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도 있었다.


게다가 JTBC <청춘시대> 시즌 1과 시즌 2에서 송지원 역을 통해 사랑스러운 매력을 마음껏 발산했던 박은빈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데 어찌 시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궁금하기도 했다. 여러 명이 공동 주연을 맡았던 <청춘시대>와 달리 <이판사판>에선 한 편의 드라마를 온전히 이끌어 가야 하는데, 과연 그 부담감을 이겨낼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만큼 박은빈이라는 배우에게 큰 잠재력이 있다고 봤고, 어쩌면 <이판사판>이 주연 배우로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됐다.




▶ <이판사판> 시청률

1회 : 6.9%, 2회 8.0%, 3회 : 7.2%, 4회 : 7.6%


안타깝게도 기대가 꺽이기까진 첫 주만으로도 충분했다. '가수는 제목을 따라간다'는 속설이 있는 것처럼 드라마의 운명도 제목을 따라가는 걸까? <이판사판>은 제목처럼 그야말로 '이판사판(理判事判)'을 방불케 했다. 연출, 대본, 캐릭터 등 어느 것 하나 극단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법원 최고의 꼴통 판사라는 별명이 붙은 이정주(박은빈)는 법정에서 궤변을 늘어놓는 피고인 김주형(배유람)에게 물병을 던지고 욕설을 내뱉었고, 심지어 법복까지 벗어던지가 단상 위에 올라가 광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야말로 뜨악한 장면이었다.


'성폭행을 한 게 아니라 성교육을 한 것'이라는 말이 분노를 자아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정주의 비이성적 행동이 '사이다'스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비현실적인 캐릭터 설정에서 오는 의아함만 남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남편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장순복(박지아)은 별건의 재판을 받고 돌아가던 중 감시를 피해 법정에 들어와 "나의 무죄는 당신들의 유죄다"라는 혈서를 남겼다. 또, 아동연쇄강간범 김주형은 법정에 칼과 라이터를 소지한 채 들어와 이정주를 대상으로 인질극을 벌이기까지 했다.



'판사 장려 드라마'를 자처하며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 법원을 견학까지 했다지만, 이와 같은 무리한 설정 앞에서는 무의미한 일에 불과했다. 동시간대에 방송되는 다른 드라마들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초반에 자극적인 소재를 활용하는 전략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그것이 몰입을 방해할 정도로 비현실적이고 어설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게다가 <이판사판>의 배경은 '법정'이고, 주인공이 '판사'가 아니던가. 그곳이라고 냉혹함만 있다거나 그들이라고 해서 항상 이성적인 건 아니지만, 지나친 가벼움은 결코 설득력 있지 않았다.


<이판사판>의 제작진은 감정적으로 격분하(거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판사의 모습을 통해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고자 했을지 모르겠지만, 시청자들의 입장에선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박은빈의 연기에는 열정이 가득 묻어 있었지만, 한편으론 오버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쏭'의 추억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캐릭터가 잡힌 덕분에 마음껏 놀 수 있었던 <청춘시대>와는 다른 전략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것이 전적으로 박은빈의 잘못이라 보긴 어렵다. '쏭'의 발랄함만을 강조한 작가의 책임이 훨씬 크다.



드라마의 전개는 초반에 불과하지만, 패는 이미 다 나왔다. 이정주의 오빠 최경호(지승현)의 미성년자 강간 및 살인, 장순복의 남편 살해 사건 등 '진범'을 가려내야 할 사건들이 드라마의 주요 숙제로 자리잡았다. 그 뒤로 복잡한 인간관계가 얽히고설켜 있고, 어김없이 권력과 음모가 숨겨져 있다. '오판'으로 인한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바로잡고는 데 <이판사판>은 그 힘을 집중할 태세다. 또, 잘못된 판결이 개인 및 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던질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무거운 사건들을 밝은 분위기로 끌고 가고 싶었던 <이판사판> 제작진의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한없이 가벼웠던 첫 걸음은 실망스럽기에 충분했다. 또, 여자 주인공을 왈가닥에 미성숙한 캐릭터로 설정하고, 남자 주인공 사의현(연우진)의 도움과 보호을 받는 인물로 그려나간 점은 구태의연해 아쉽기만 하다. 비슷한 설정의 KBS2 <마녀의 법정>이 걸크러시한 마이듬(정려원) 검사를 통해 보여줬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출발을 보여준 셈이다. 과연 <이판사판>이 시청자들의 혹평을 딛고 본연의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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