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밀정>, 극단적 시대에서 회색의 삶을 살았던 이정출에게서 나를 본다

너의길을가라 2016. 9. 8.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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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와 친일파.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정확히 '이분법'으로 나뉜다. 마치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두 가지 선택지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는 듯 말이다. 그 협소한 틀 안에 갇혀버린 까닭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때로는 그 갇혀 있음이 역사와 시대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최동훈 감독이 <암살>을 통해 '밀정'의 존재를 소개했다면, 김지운 감독의 <밀정>은 본격적으로 '회색 지대'에 서 있던 '밀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로 '회색 인간' 이정출(송강호)을 통해서 말이다. 



경부국 경부 이정출은 과거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인물이지만, 변절과 동시에 자신이 갖고 있던 정보를 팔아 히가시 부장(츠루미 신고)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에는 여러 루트로 밀정들과 연락하며 독립군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한다. 실제로 일제는 암암리에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을 추적해 제거하고, 비밀리에 조직된 항일(抗日) 단체들을 말살하기 위해 밀정(密偵)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대로 항일 단체와 독립운동가들은 보이는 적과 싸우는 데도 벅찬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적까지 상대하느라 더욱 진땀을 빼야 했다. 


▶반민족 행위 처벌법

제4조 다음 각 호 중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 15년 이하의 공민권을 정지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할 수 있다.

4. 밀정 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6. 군경 ·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1948년 9월 22일 제정된 반민족 행위 처벌법에는 '밀정 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를 처벌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를 통해 그만큼 '밀정'의 해악만큼이나 그 수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반영하듯 영화 속에는 다양한 '밀정'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이정출은 말할 것도 없고(이정출의 경우에는 6호가 적용될 테지만, 심지어 의열단 내에도 밀정이 존재한다. 그들의 주변 사람들도 어느새 밀정이 되어 있다. 이유는 여러가지다. 반일과 항일이라는 뚜렷한 신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발현된 기회주의라고 매도할 수 있겠지만, 그러기엔 숫자가 너무 많다.



이쯤에서 고백을 해야 할 것 같다. 일제 강점기를 이야기할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불편함이 자리잡고 있음을 느낀다.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반추할 때마다 그 '고됨'에 가슴 아파하고 그 위대함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끄러움과 씁쓸함이 해일처럼 몰려오는 것을 경험한다.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과연 그들처럼 살 수 있었을까?" 대답은 언제나 침묵이다. 솔직히 자신이 없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기껏해야 내 몸을 사리며 조용히 시골 어딘가에 쳐박혀 살지 않았을까, 그 정도다. 


목숨 걸고 독립 운동을 할 배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앞장섰을 수도 없을 것 같다. 애초에 그건 깜냥이 부족한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자면, 어쩌면 가난에 허덕이다 생계형 친일부역자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부끄럽지만 그래도 살아남아야겠기에. 동포의 등에 칼을 꽂는 밀정 짓은 하지 말아야지 싶다가도, 그 무자비한 폭력(고문) 앞에, 가족의 막막한 생계 앞에, 나약하기 그지 없는 내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밀정>은 이러한 고민에 허덕이는 불쌍한 중생에게 해답이 이를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김지운 감독과 송강호는 "<밀정>에서 밀정이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김 감독은 "<밀정>의 방향은 선과 악의 구분처럼 이분법적인 역사관이 아니다. 붉지도, 검지도 않은 색이다. 좌절의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이 겪는 현실적인 고뇌와 갈등을 조명한다. 시선의 각도가 새로운 영화"라고 설명하고, 송강호는 "밀정을 찾기보다는 혼란스러운 그 시대를 살아가던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는데 연기 포인트를 뒀다"고 말한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독립운동가 김장옥을 쫓는다. 이정출은 옛 동지였던 김장옥(박희순)을 굳이 '생포'하려고 애쓰는데, 한편으론 궁지에 몰린 김장옥에게 "넌 이 나라가 독립이 될 거 같냐. 어차피 기울어진 배야"라며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김지운 감독은 초반의 이 짧은 장면을 통해 모호하기 짝이 없는 이정출의 캐릭터와 불안하고 혼동스러운 시대적 상황을 매우 적절히 표현해낸다. 경계 선상에 서 있는 이정출은 호형호제하기 된 의열단의 김우진(공유)을 도우면서도 "다시 만났을 땐 내가 어떻게 변해있을지 장담 못 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외형적으로 일본 앞잡이처럼 보여도 사실 처음부터 마음에 소용돌이를 겪었다. 그건 김지운 감독의 연출 의도이기도 하다. 얄팍한 인물이 만드는 낮은 세계가 아니다. 세련된 방식으로, 아픈 시대의 고통을 더 깊게 느끼게 한다." (송강호)


이처럼 심리적 변화를 겪는 이정출에게서 항일과 친일이라는 극단적 선택이 공존하던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을 엿본다면 지나친 말일까. 지금과 마찬가지로, 분명 그 시대에도 과거의 조국에도 지금의 조국에도 충성을 다하지 않은 채 자신의 목숨(실리)을 지키기 위해 이리저리 들러붙는 사람들이 존재할 터. 그리고 기회주의적 삶을 살아간(혹은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범주에 '나는 결코 포함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기에 <밀정>이 주는 울림은 더욱 크고 진하다. 그것은 곧 나의 나약함이기도 하지만, 시대가 품고 있는 아픔이기도 하다.


<장화홍련>, <달콤한 인생>,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통해 스타일리쉬하면서도 기품 있는 영화들을 만들어 왔던 김지운 감독은 이번에도 세련된 영화를 이끌어냈다.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초반의 추격장면과 정체를 숨기며 서로에게 접근한 김우진과 이정출의 심리전이 펼쳐지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감각적인 카메라와 수려한 미술, 특히 고문 장면에서 등장하는 스윙재즈 음악은 인상적이다. 비극적인 장면에서 비극적인 음악을 쓰는 게 아니라 되려 밝고 흥겨운 음악을 쓰는 반어적 접근은 비극성을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영화를 돋보이게 만든 건 배우들의 열연도 큰몫을 했다. 밀정 이정출 역을 맡은 송강호는 이번에도 '경이로운' 연기를 펼쳤고, 공유는 멋스러우면서도 섬세한 의열단원 김우진 역을 훌륭히 소화했다. 연계순 역의 한지민은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담대한 힘을 보여줬고, 의열단 단장 정채산 역으로 특별출연한 이병헌은 반박 불가의 연기력을 선보였다. 김지운 감독은 "송강호의 호연과 배우들의 앙상블에 내가 무임승차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는데, 그의 말은 결코 겸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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