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립반윙클의 신부>, 이와이 슌지가 직시한 현대 사회

너의길을가라 2016. 10. 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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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하자면 지금 일본은 큰 상처를 입은 말과 같다. 지난 4년 동안 일어서려고 애써왔지만 억지로 절뚝거리며 걸을 수 있을 뿐이었다." <한겨레>, '이와이 월드' 채우는 비판의식.."절뚝거리는 말, 그게 일본"


2015년 12월 11일 '이와이 슌지 기획전 - 당신이 생각하는 첫 설렘'을 위해 대한민국을 방문했던 이와이 슌지(岩井俊二) 감독은 당시 일본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언급하며 우려를 드러냈다. "영화인으로서 작가로서 할 일이 많다고 느낀다. 알려야 할 일들이 아주 많다"던 그의 진지한 문제의식과 통렬한 책임감은 12년 만의 신작인 실사영화(實寫映畵) <립반윙클의 신부(リップヴァンウィンクルの花嫁)>를 통해 절묘히 표현됐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일본 전역(全域)을 충격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던 2011년 3 · 11 대지진의 여파는 이와이 슌지에게도 가닿았는데, 그는 "지진과 원전사고로 내가 태어난 나라가 큰 상처를 입게 됐다. 그렇게 상처 입은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씨네21>, 거짓과 진실의 위태로운 관계 맺기 - <립반윙클의 신부> 이와이 슌지 감독)"다고 고백한다. "내가 느낀 이 사회의 불안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이와이 순지는 '마음 약하고 소심한 젊은 여성' 나나미(구로키 하루)를 통해 고립된 채 불안에 떠는 일본 사회를 비춘다. 


이와이 슌지 감독이 주목한 건 바로 'SNS(Social Network Service, 사회 관계망 서비스)'였다. 현대 사회의 '소통 방식'으로 자리잡은 SNS는 그 영향력을 이미 우리 삶을 규정하고 좌지우지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사람들을 사귀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기존의 관계들을 돈독히 만든다. 그건 기본이다. 현실 속에서는 할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는 '대나무 숲'의 기능을 하기도 하고, 실체를 모르는 낯선 사람들과 은밀한 관계를 만들어나가기도 한다. 심지어 '가상의 나'를 내세워 은밀한 놀이를 벌이기도 한다. 



'맞선 사이트에서 남친을 발견했다. 인터넷 쇼핑을 하듯 너무나 쉽게 손에 넣었다.'


소극적인 성격의 나나미는 맞선 사이트(데이트 앱)에서 남자친구를 만난다. 그리고 '플래닛'이라는 SNS에 너무 쉽게 찾아온 사랑에 대한 '불안감'을 적어 넣는다. 두 사람은 이내 결혼까지 하게 된다. 남편은 우연히 나나미가 남겼던 글을 발견하고, "내 아내가 이런 걸 한다면 당장 이혼할 거"라면서 "당신은 아니겠지?"라며 농담을 건넨다. "SNS에서 만났지만 행복하게 살자"고 말하는 남편에 안긴 나나미의 표정은 어둡기만 하다. 이 실체 없는 만남, 관계에 대한 근원적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다.


결국 결혼 생활은 불행하게 끝나고 만다. 나나미는 부모의 이혼으로 친척들을 결혼식 하객으로 부를 수 없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SNS에 도움을 청하고, ID '클램본'의 소개로 알게 된 사설 청부업자 아무로(아야노 고)의 도움을 받게 된다. 가짜 하객을 불러 당장의 결혼식은 어찌어찌 치렀지만, 거짓말이 들통면서 나나미는 위기에 봉착한다. 순진한 나나미는 아무 것도 모른 채 계속해서 아무로를 의지한다. 모든 것을 쉽게 얻을 수 있지만, 동시에 그 무엇도 아닌 SNS의 양면성을 적확히 포착한 듯 하다.




그래서 SNS는 실체가 없고, 불안하고, 나쁜 것이란 것일까? 그런 성급한 판단을 내리면 곤란하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그 판단을 보류한다. 데이트 앱을 통해 만난 나나미와 남편은 실체적으로 깊은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SNS를 통해 알게 된 아무로는 정체와 의도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나나미를 정성을 다해 돕는 척 하지만, 끊임없이 절벽으로 몰고 간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혹은 의뢰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아무로의 행동들은 '탈윤리적'으로 보인다. 그건 SNS의 성질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로는 나나미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아무로의 소개로 '가짜 하객'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나나미는 급조된 가상의 가족으로부터 현실의 가족으로부터 느끼지 못했던 따뜻한 위안을 얻는다.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나나미는 안락함을 느낀다. 그 위로를 느끼는 게 나나미만이 아니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객체화되어 있는 현실의 사람들이 SNS를 통해 새로운 관계들을 형성해 나가고, 그 관계가 실제의 것보다 더 진짜 같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역시 아무로의 주선으로 연결된 AV 배우 마시로(코코)와의 만남은 의지적이고 나약했던 나나미가 홀로 서는 기폭제가 된다. '립반윙클'이라는 ID를 사용하는 마시로와 나나미는 '우정' 그 이상의 감정적 교류를 나누게 된다. , '소울 메이트'로서 두 사람은 각자가 안고 있는 존재의 빈자리를 온전히 채워주는 관계를 형성한다. 이는 SNS를 통한 관계의 형성이 실제의 그것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는 목소리를 대변한다. 중요한 것은 '관계' 그 자체이지 그 관계를 연결해 준 '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우나 고우나,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SNS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그 SNS의 양면적인 성격은 역(易)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되비춘다. 어느 곳이든, 누구에게든 가 닿을 수 있는 '연결성'과 언제든 끊어낼 수 있는 '단절성'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 실체와 가짜를 분간할 수 없고, 그런 구분조차 무의미해진 세상인지도 모른다. 개별화(個別化)되고, 객체화된 현대의 우리들은 그 '홀로있음'의 공포와 적막을 견디지 못하기에 SNS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된다. 필요한 건 섣부른 '판단'이 아니라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다.


<러브레터>(1995), <4월 이야기>(1998), <하나와 앨리스>(2004)에 이어 <립반윙클의 신부>에서도 '이와이 월드' 특유의 서정과 감성을 만날 수 있다. 4년의 준비 과정이 만들어 낸 영상미는 탁월하다. '역시 이와이 슌지!'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기승전결의 뻔한 구조에 벗어나 인물의 감정선을 중요시하는 특유의 감각적인 연출법도 돋보인다. 여기에 일본 사회(를 넘어 현대 사회)를 조망하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날카로운 비판 의식이 더해지면서 영화는 무게감까지 더해졌다. 



구로키 하루(黒木華)는 아오이 유우(蒼井優)에 이어 이와이 슌지 감독의 '새로운 얼굴'로 캐스팅 됐는데, 화장기 없는 순수한 얼굴에 담겨 있는 다양한 표정들은 관객들의 감정을 충분히 적시고 뒤흔든다. 후반부에서 나나미가 아무로와 마시로의 어머니와 함께 술판을 벌이는 장면은 감정선을 폭발시키는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데, '옷'을 벗어 버린 채 오열하는 아무로와 마시로의 어머니와 '살풀이'에 동참해 술을 연신 들이키는 나나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울컥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당신의 두 눈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의미와 이유에 대해 '자신만의 대답'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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