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 연예

함께 늙어가고 싶었던 사람, 故 김주혁을 추모하며

너의길을가라 2017. 11. 1. 11:53
반응형


믿기지 않는 어떤 일이 너무도 갑자기 닥쳤을 때, 우리는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선다. 그렇게 할 말을 잃는다. 감정은 그 후의 문제다. 얼마 뒤 시간이 다시 본연의 움직임을 되찾으면 그제야 감정의 파도가 시작된다. 물밀듯이 몰려와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박살내기도 하고, 때론 서서히 스며들어 이내 헐고 내려앉게 만든다. 김주혁의 죽음이 그랬다. 본래 죽음이란 예고 없는 일이고 때를 가리지 않지만, 45세의 젊디젊은 그에게 지나치게 이른 듯 보였다. 또, 너무도 가혹했다. 


지난 30일 저녁께 '김주혁 교통사고로 사망'이라는 기사를 접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업데이트 되는 추가 보도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사고의 경위를 담은 자세한 내용의 기사들이 쏟아졌고, 그제야 그의 죽음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속의 일이 됐다. '차라리 오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믿기지 않는 소식을 접하고, 그 순간에 멈춰섰을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파도는 한참 뒤에 몰려왔고, 밤잠을 쉽사리 이루지 못한 채 그를 슬퍼하며 추억했다. 



1993년 연극 무대를 시작으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김주혁은 1998년 SBS 8기 공채 탤런트에 합격하면서 본격적으로 대중들을 만났다. 그 세월이 무려 20년이다. 영화 <싱글즈>(2003), <홍반장>(2004), <광식이 동생 광태>(2005) 등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며 영화배우로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나갔고, SBS <프라하의 연인>(2005)에서 무심하고 깐깐한 듯 보이지만 마음 속은 한없이 따뜻한 최상현 역을 소화하며 대중 곁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김주혁의 연기에 대한 열정은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가리지 않았고, 그 끈기와 단단함은 쉼없이 이어졌다.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청연>(2005), <사랑따윈 필요없어>(2006), <아내가 결혼했다>(2008), <방자전>(2010) 등의 작품을 올리며 신뢰감 있는 배우로 우뚝섰다. 넘치지 않는 절제된, 그러나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는 은은함은 김주혁이라는 배우의 덕목이었다. 또, MBC <무신>(2012), MBC <구암 허준>(2013)에 연달아 출연했는데, 그의 안정감 있는 연기는 사극에서도 빛이 났다.   



"2년 전에는 많이 지쳤다. 살이 깎일 대로 깎였다그 살을 <1박2일>이 많이 채워줬다."


하지만 그라고 왜 슬럼프가 없었겠는가. 한 분야에서 오랜 기간 머무르다보면 필연적으로 정체기를 겪기 마련인데, 매번 뛰어난 연기를 펼친 그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던 찾아왔던 모양이다. 김주혁에게 KBS2 <1박 2일>을 통한 '외도'(2013년 12월 1일부터 2015년 12월)는 반전의 기회이자 신의 한 수였다. 그는 꾸미지 않은 특유의 수더분한 모습으로 시청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고, '구탱이 형'이라는 구수한 별명으로 불리며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예능을 통해 비쳐지는 순박한 모습으로 많은 사랑을 받을수록 덩달아 고민도 커졌을 것이다. 아무래도 본업인 연기에서 맡은 캐릭터와 상충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김주혁은 <공조>(2016) 개봉을 앞둔 시점에서 <1박 2일> 하차를 결정했다. 그가 맡은 차기성이라는 인물이 악역이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으리라. <비밀은 없다>(2016)에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음에도 '이질감'이 들었던 문제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또, 연기에 대한 갈증이 남달랐던 그였기에 하차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예능 출연은 김주혁이라는 배우의 인지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의 본업인 연기에 큰 도움이 됐다. 김주혁은 "예능 속 내 모습들을 보면서 내가 하는 행동이 굳이 연기를 안 해도 되는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며, "내가 굳이 무엇을 안 해도 표현이 되"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 깨달음의 산물이 바로 tvN <아르곤>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주혁은 저널리즘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아르곤 팀장 김백진 역을 맡았는데, 그 내면의 치열함을 완벽하게 표현해 찬사를 받았다. 김주혁은 김백진 그 자체였다. 



"요즘 연기하는 게 재미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할까. 글을 봐도 얄팍하게 보였다면, 이제는 좀 더 깊이 보이는 것 같다."


우리는 김주혁이라는 배우를 잃었다. '요즘 연기하는 게 재미있다'던 그는 분명 앞으로 보여줄 모습이 훨씬 많은 배우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슬픔은 단지 '배우' 한 사람을 잃었기 때문이라기엔 너무 깊고 크다. 쉽사리 잊히지 않는 이 슬픔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가슴 먹먹함의 까닭은 무엇일까. 도무지 답을 찾기 어려워 한참을 헤매던 차에 <1박 2일> 출연 당시 김주혁의 영상들을 보게 됐다. 한없이 푸근한 미소, 무슨 말이든 다 들어줄 것 같은 넉넉한 마음씨. 동네 형과 같은 친근함이 그에게 있었다.


그제야 알게 됐다. 우리는 함께 늙어가고 싶었던 한 명의 사람을 잃은 것이다. 매순간 거짓없이 진실된 모습으로 시청자들과 소통했던 김주혁에게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마음을 내어줬나보다. 과거 꿈이 무엇인지 묻는 인터뷰에서 "좋은 연기자가 되는 건 당연하다. 훗날 사람들에게 '참 저놈 잘 살았다'는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대답했던 그가 지상에서 보내고 있는 수많은 '대답'들을 들었길 바란다.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는 김주혁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이 비루한 글을 바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