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평가를 넘어선 역사적 왜곡, 김구 선생에 대한 정미홍의 망언

너의길을가라 2014. 6. 30.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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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정미홍의 망언을 제보받고 기사로 쓸지 망설였다. 망언이 한, 두번도 아닌데 그 망언을 자꾸 보는 것도 괴로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 김구 선생을 김일성 부역자로 매도하는 발언을 듣곤 생각이 바뀌었다. 이 사람은 처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 고상만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백범 김구'에 대한 가장 엽기적인 평가를 정미홍 씨의 입을 통해 듣게 됐다. 이승만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 라이벌이었던 김구에 대한 폄훼로 이어진 것일까? 아무리 '망언'을 습관처럼 한다고 하더라도 넘어선 안 될 선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물론 백범 김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김구를 뜬금없이 '김일성의 부역자'로 취급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에 비춰보더라도 어불성설이며, 그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몰상식한 짓이다. 


이쯤에서 정미홍 씨의 백범 김구에 대한 평가를 잠시 들어보자. 혹시 혈압이 높으신 분들은 심호흡이라도 하고 읽으시길 권한다. 그만큼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수준이다. 


"지금 김구 선생이 최고의 애국자라고 되어 있지만 그분은 김일성에 부역한 사람이고 좌파 역사학자들이 영웅으로 만들어놓은 사람이다. … 김구는 시골 출신으로 아무것도 모르다가, 조선 독립운동만 하다가 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분단은 안 돼' 이래 가지고 이쪽(남쪽)에서 선거를 한다고 하니까 그냥 무단으로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 … 북한은 당시 남한보다 훨씬 잘 살고 있어 김일성이 세 보이니까 김일성이 뭐라고 하든 무조건 '통일을 시키겠네' 이렇게 묻어버린다. 그래서 거기서 김일성 만세를 부르고 했는데…"


위의 내용은 지난 6월 23일 한 언론사가 주최한 워크숍에 초빙강사로 참석한 정미홍 씨가 했던 강연의 일부다. 백범 김구에 대한 엽기적인 평가 외에도 대구 10월 항쟁(1946년)과 제주 4·3 사건(1948년)여순사건(1948년)을 "빨치산 공산주의 폭도들에게 경찰과 군인, 그리고 양민이 학살된 사건"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제주 4·3 사건 등을 '폭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비공식적인 입장이기도 하다. 또, 보수를 참칭하는 세력들이 입버릇처럼 주장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것만으로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정미홍 씨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백범 김구'마저 '종북 세력'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과연 정 씨의 의견을 대한민국 내의 소위 보수(수구)세력들이 얼마나 동조할지 의문스럽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정미홍의 '백범 김구'에 대한 평가 중 유일하게 사실에 부합하는 것은 김구가 '시골 출신'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김구는 황해도 해주 출신이니, 그를 두고 시골 출신이라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의 나머지 발언들은 개인적 '편견'에 근거한 '평가'이거나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는 역사적 왜곡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이 있어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자주 독립적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이때에 있어서 어찌 개인이나 자기 집단의 사리사욕에 탐하여 국가 민족의 백년 대계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 마음속의 38도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도선도 철폐될 수 있다. … 현실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의 달성을 위하여 함께 노력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구깅 수요로 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김구,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1948.2.10. -


필자는 정미홍 씨가 김구를 두고 '아무 것도 모르다가', '조선 독립운동만 하다가', '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와 같은 평가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맥락을 살펴보면,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백범 선생이 국제정치적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했다'는 것이리라. 이는 제1대 내무부 장관과 13대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던 윤치영이 김구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비판하면서 했던 말이기도 하다. 



- 출처 : 백범김구기념관, 백범 김구의 반탁운동 연설 -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옳은 것이었는지 그른 것이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논쟁은 가능한 것이다. 이승만을 국부로 떠받드는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학자들은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역사적 결단이라 칭송하기도 한다. 물론 뉴라이트 계열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여러가지 판단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인형이여, 지금 이곳에는 38도선 이남과 이북을 별개국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쪽에도 그런 사람이 없지 아니하리라고 생각됩니다. … 남이 일시적으로 분할해 논 조국을 우리가 우리의 관념이나 행동으로써 영원히 분할해놓을 필요야 있겠습니까. 인형이여,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쪽을 낼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가련한 동포들의 유리걸개하는 꼴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인형이여, 우리가 불사하지만 애국자임은 틀림없는 사실 아닙니까. 동포의 사활과 조국의 위기와 세계의 안위가 순간에 달렸거늘 우리의 양심과 우리의 책임으로써 편안히 앉아서 희망 없는 외력에 의한 해결만 꿈꾸고 있겠습니까. 그럼으로 우사(김규식) 인형과 저는 우리 문제는 우리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남북지도자회담을 주창하였습니다. 주창한 것만이 아니라 이것을 실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 북쪽에서는 인형과 김일정 장군이 선두에 서고 남쪽에서 우리 양인이 선두에 서서 이것을 주장하면 절대 다수의 민중이 이것을 옹호할것이니 어찌 불성공할 리가 있겠나이까. 인형이여 김일성 장군께는 별개로 서신을 보내거니와 인형께서는 수십 년 한 곳에서 공동분투한 구의와 4년 전에 해결하지 못하고 둔 현안 매해결의 연대 책임과 애국자가 애국자에게 호소하는 성의와 열정으로써 조국의 땅 위에서 남북지도자 회담을 가장 빠른 기간 내에 성취시키기를 간청합니다. 


- 김구, 김규식 「김두봉에게 보낸 편지」, 1948.2.16. -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광복 1주년 축사 -


또, 김구의 남북협상 참여에 대해서도 그것이 조국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 때문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고, 혹은 이승만과의 결별과 정치적 입지를 위한 전술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물론 그 두 가지 모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과 역사적 인물에 대해 사료를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평가를 하는 것은 오히려 장려할 일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을 한다고 해서, 다시 말해서 김구의 판단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다고 해서 무조건 '친일파', '매국노'라고 비난할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정미홍 씨가 역사적 평가의 영역을 넘어서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김구를 두고 '김일성에 부역한 사람'이라고 규정한 근거는 무엇일까? 또, '김일성이 세 보이니까 김일성이 뭐라고 하든 무조건 '통일을 시키겠네' 이렇게 묻어버린다'는 발언은 어떤 사료를 근거로 한 것일까? 결정적으로 '그래서 거기서 김일성 만세를 부르고 했는데'와 같은 것은 사실과 반대다. 


장건상의 증언에 따르면, '연석회의 당시 대부분의 인사들은 김일성 만세를 불렀고, 그러면 누군가 술을 따라주고 밴드가 울린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전혀 김일성 만세라는 말을 안했다'고 한다. 이것이 팩트다. 정미홍 씨는 무슨 근거로 이와 같은 왜곡된 사실을 '언론사 초청 강연'에서 함부로 말했는지 모르겠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 김구, <나의 소원> -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1919년 상하이로 건너가 평생을 독립 운동에 헌신했던 백범 김구. 임시정부 내부총장 안창호를 찾아가 '문지기'가 되기를 자청했던 백범 김구. 내부적 갈등(창조파와 개조파의 갈등)과 자금난 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켰던 백범 김구.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던 백범 김구. 


상하이(1919)에서 항저우(1932), 난징(1937), 한커우, 창사, 헝양, 광저우, 류저우(1938), 구이양, 치장, 충칭(1940)으로 쫓겨가야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조국의 독립에 대한 꿈을 접지 않았던 백범 김구. 완전한 민족주의자이자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백범 김구가 '김일성에 부역한 사람이고 좌파 역사학자들이 영웅으로 만들어놓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2014년 대한민국의 현실은 정말이지 참담하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이 다양한 사료를 수집하고 섭렵하는 것이다. 객관적 사료 선택은 기본이고, 그 사료들을 '편견' 없이 읽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정미홍 씨의 경우에는 사료 선택부터 독해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맹점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자신이 갖고 있는 김구 선생에 대한 '편견'이 너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왜곡'을 하는 데도 망설임과 주저함이 없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정미홍 씨의 김구 선생에 대한 발언은 '역사적 평가'를 넘어선 '역사적 왜곡'이다. 정미홍 씨는 자신이 비난받고 있는 이유에 대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평가'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김구가 반공주의에 기여(강준만)했다거나 점령국가의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대책없이 반탁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허송세월을 했다(최상천)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정미홍의 망언은 그 자체로 '역사적 왜곡'이자 '악의적인 폄훼'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스스로를 '보수' 혹은 '우파'라고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면,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정미홍의 망언에 분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민족주의적 관점'에 대해 다소 비판적이지만, 보수(혹은 우파)에게 '민족'은 지상 최고의 가치가 아니던가? 그리고 김구 선생이야말로 민족의 상징과도 같은 역사적 인물이다. 김구 선생에 대한 명예훼손과 모욕, 그것을 모른 척 지나간다면 어찌 스스로를 보수(혹은 우파)라고 칭할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사법처리보다는 '치료'가 우선인 것처럼 보이는 정미홍 씨를 워크숍에 초빙강사로 부른 언론사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언론사의 '배후'에는 어떤 무리들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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