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 논란, 아이들의 생각은 없고 어른만 싸운다

너의길을가라 2015. 5. 9.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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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倂記)'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지난해 9월 교육부는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2018년부터 초등학교 3~6학년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한자교육을 강화하겠다는 것이 명분이다. 이러한 교육부의 방침에 대해 한글문화연대, 한글학회, 전국국어교사모임 등 27개 단체는 "사교육비와 학습부담을 늘린다"며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학부모들의 의견은 양분(兩分)된 상황이다.


강한 반발이 이어지고 있지만, 현재로선 교육부가 입장을 철회할 것 같진 않다. 따라서 2018년에는 초등 3·4학년, 2019년에는 5·6학년 교과서에 약 400~500자 내외의 한자가 한글과 함께 쓰이게 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사교육'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데, 교육부는 사교육 유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한자를 시험에 출제하지는 않도록 할 것이라 밝혔다.


ⓒ 오마이뉴스


그렇지만 "아무리 시험에 안 나온다고 해도 교과서에 한자가 있으면 학습지 하나라도 더 시키게 되는 게 부모 마음"이라는 한 학부모의 말처럼 사교육 시장에 한자 열풍이 불 가능성은 충분하다. 실제로 <오마이뉴스>는 한자 병기 요구 단체들, 한자로 '돈벌이'?, '한자병기' 주도 최대 조직, 사교육업체와 손잡아 라는 기사를 통해 한자 시험을 통한 돈벌이와 유료 한자 사교육 사업 등을 보도하며 의혹을 제기했다.


관련 단체들은 부인하고 있지만, 이런 일에 '쩐'이 빠질 리 만무하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그러한 것 아니겠는가? '학생들의 어휘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고상한 이유 뒤에는 음흉한 자본의 논리가 개입되어 있는 셈이다. 물론 한자가 전체 어휘의 70%(초등학교 국어책의 55%)를 차지하고 있고, 정확한 국어를 사용하기 위해 한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한자를 공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용(效用)은 분명 크다.


ⓒ 경향신문


하지만 포인트는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라는 점을 잊지 말자. 이미 중·고등학교에서 한자 교육이 이뤄지고 있음에도 굳이 초등학교까지 이를 확대할 '필연적'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단지 어휘력 향상을 위해서? 정확한 개념 파악에 도움을 줘서 적극적인 자기주도학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이러한 논리가 불편한 까닭은 지극히 '어른'들의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찬성 쪽의 주장들을 살펴보면 결국 지식 수준 등 공부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으로 수렴되고, 거기에 기껏해야 인성교육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에 그치고 있다. '한자 몇 자를 배운다고 학생들의 인성과 인문 소용이 좋아진다고 할 수 없다'는 반론 앞에 또 다른 반론을 제기할 순 있겠지만, 이는 한 쪽을 제압할 수 없는 끝없는 싸움에 불과하다.



교육부는 '사교육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단정지었지만, 이는 순진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 한자가 병기된다면, 그 이전부터 한자 학원을 다니는 등 한자를 '선행학습'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의 말처럼 "한자 사교육을 받고 온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의 반응 차이가 커지고, 한자를 모르는 아이는 교과서 읽는 속도와 흥미가 떨어지며 수업 격차가 더 벌어질 우려가 있"고 학부모들이 이를 간과할 리 없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사교육 부담이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는 가뜩이나 '사교육 열풍'에 등 떠밀려 과도한 학습 부담에 허덕이고 있는 아이들에게 '한자'라는 또 다른 짐까지 얹어주는 일이 될 것이다. 표현의 잔혹성이 문제가 됐긴 했지만, '잔혹동시' 속에 담긴 절규를 보라! '아이들의 위해서'라는 명분 하에 자행되고 있지만, 실상은 부모의 욕심에 지나지 않는 사교육 열풍으로 인해 학원에서 학원을 전전하는 아이들의 심정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노컷뉴스


정작 우리가 초등 국어에서 아이들에게 배우게 해야 할 내용은 무엇일까? 이창덕 경인교대 국어교육과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초등 국어에서는 먼저 중요한 우리말을 알고, 언어 예절을 익히고, 상황과 목적에 맞게 말하고 글을 쓰고, 상대방과 공감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자꾸만 교육 환경을 조선시대의 서당으로 회귀시키려는 '어른'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우리가 아이들에게 전달해주어야 할 국어 능력은 단순히 학습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고등학교에 가면 자연스럽게 배우게 될 텐데 굳이 초등학교 때부터 부담을 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요즘은 초등학교 고학년 교과서도 어렵더라. 이런 걸 벌써 배우나 깜짝 놀랄 때도 있다. 여기에 한자까지 쓰여 있으면 아이들이 교과서를 볼 때 복잡해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괜찮은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급수시험 같은 한자 자격증 따게 하려고 아이들 한자 가르치는 부모들이 많다. 어차피 배울 거라면 자주 접할수록 더 좋다. 한자도 언어인데 계속 보고, 쓰고 하지 않으면 잊어버린다"


초등 '한자' 병기 논란, 학부모에 물었다.."아이들 힘든데" vs "어차피 배워야" <쿠키뉴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엇갈리고, 관련된 각 단체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있다. <쿠키뉴스>는 학부모들의 의견을 경청하기도 했다. 이처럼 많은 의견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정작 한자가 병기된 교과서를 수업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인 당사자인 아이들의 의견을 묻고 듣는 과정은 눈에 띄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모든 것은 '어른들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고 만다.


'아이들이 뭘 알겠어. 우리가 다 결정을 해줘야지'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은 세상에서 아이들은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의사결정권 자체를 부여할 순 없더라도, 적어도 아이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 그 의견을 경청하는 태도 정도는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서로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긴 했지만, 여러가지 의미에서 이 싸움 역시 '어른'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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