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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행 거부한 장나라, 'VIP' 성숙한 이별로 막장의 오명은 벗었다

너의길을가라 2019. 12. 25.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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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난 10년간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어. 그래서 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었어. 당신 참 미웠는데, 어머니가 그 얘기 하시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 미움만 남기엔 너무 많은 일이 있었나 보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정선(장나라)은 악마가 되기를 거부했다. 마지막 순간, 지옥행 열차에서 발을 뺐다. 복수하고 싶었다. 화가 북받쳐 올라서, 참을 수 없는 욕지기가 솟구쳐서 견딜 수 없었다. 혼자 지옥에 떨어질 순 없었다. 다 부숴버리고 싶었다. 망가뜨리고 싶었다. 무엇이 중요한지 알지 못한 채 순간의 감정에 휩쓸린 성준(이상윤)이 원망스러웠다. 깨닫게 하고 싶었다. 깨뜨리고 싶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유혹도 있었다. 어쩌면 힘도 있었다. 성운 백화점 사장 하태영(박지영)은 자신의 사람이 돼 달라고 했다. 그리하면 복수를 돕겠다고 했다. 마음만 먹으면 성준을 밑바닥으로 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난 나 팀장이 끝까지 갔으면 좋겠다."고 부추기던 하 사장의 말이 오히려 정선을 멈췄을까. "끝이 어딜까요?"라고 반문한 정선의 눈빛은 너무나 쓸쓸해 보였다. 

어쩌면 성준의 엄마 한숙영(정애리)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시어머니로부터 성준의 비밀, 그 역시 혼인외출생자이었다는 알게 된 정선은 감정의 변화를 겪었다. 미움이 옅어지고 마음이 아팠다. "우리가 서로를 정말 이해하고 산 걸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게 됐다. 부감적 사고를 통해 지난 10년 동안의 결혼 생활, 성준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돌이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고, 이해의 시간이 다가왔다. 정선은 관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악마가 되지 않기로 했다. 지옥에 함께 갈 이유도 없었다. 누군가를 위해 장기의 말이 될 필요도 없었다. 그러기엔 지금의 내가, 앞으로의 내가 훨씬 더 중요했다. 비록 파경으로 치달았지만, 성준은 과거의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 좋았던 기억마저 없애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랑 헤어지고 나서 그런 생각을 했었어. 애초에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까. 근데 그건 아니더라고.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었어. 그 시간을 후회하진 않아."

"네가 좋았던 기억만을 간직했으면 좋겠어. 고마웠어. 정말 고마웠어."

지난 24일, SBS <VIP>는 서로 다른 길을 걷기로 한 정선과 성준의 성숙한 이별을 보여주며 종영했다. 물론 정선의 통쾌한 복수를 기대했던 시청자들은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악에 받친 정선이 성준과 유리(표예진)를 바닥이 보이지도 않는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사이다'만 오매불망 염원했을 이들에게 VIP의 결말은 시시했을지도 모르겠다. 용두사미처럼 느껴질 것이다. 

반면, 현실적인 끝맺음이라는 의견도 많다. 실제로 막장 드라마에서처럼 악에 받쳐 상대방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상황은 그리 흔한 게 아니니 말이다. 물론 드라마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은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지옥행 열차에 올라타려던 정선을 멈춰 세우는 좋은 선택을 함으로써 <VIP>는 '막장 드라마'의 오명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복수는 결국 스스로를 파괴할 뿐이다.

한편, 성준은 유리와 끝내 결별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몰랐던,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군지 알지 못했던 성준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사진을 보며 오열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선은 성숙한 이별을 고함으로써, 무엇보다 자신의 삶과 행복에 집중하기로 함으로써 성준에게 가장 무거운 벌을 내린 셈이다. 

'불륜'을 소재로 한 <VIP>는 뜨거운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질주했다. 마지막 회 역시 15.9%(닐슨코리아 기준)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물론 시작부터 끝까지 잡음도 많았다. '내연녀 찾기'라는 자극적 장치를 과도히 사용한 점, '백화점 VIP'라는 신선한 소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점은 아쉬웠다. 게다가 이상윤의 연기력 논란까지 겹치며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럼에도 흔들림 없이 중심을 잡고 캐릭터에 100% 몰입했던 장나라의 연기만큼은 발군이었다. 또, 정선의 캐릭터를 망치지 않고 끝까지 잘 유지한 점은 칭찬할 만하다. 어찌됐든 부정을 저지르고, 부패를 일삼던 자들은 죄다 사라지지 않았는가. 정선은 행복해봤던 사람이기에, 뚜벅뚜벅 잘 걸어나갈 것이다. 그의 앞날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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