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묻는 입

일제시대는 욕하면서 군부독재는 괜찮다고?

너의길을가라 2013. 10. 1.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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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질문을 던져보자.  (한윤형이『뉴라이트 사용후기』에서 제기한 '구멍')




일제시대와 군부독재시대(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중에 어느 쪽이 더 악랄한 시대였을까? 혹은 이렇게 질문해보자. 양쪽 중 한 쪽만 긍정하는 것은 가능할까? 가령, 일제시대는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군부독재시대는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혹은 반대로 일제시대는 부정적으로 인식하면서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의 시대는 찬양하는 것이 가능할까? 일단, 전자의 경우는 흔치 않은 케이스라고 여겨진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보질 못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어떨까? 문제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일제시대를 긍정하는 사람들, 좀더 학술적인 용어를 쓰자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가령 이영훈 · 안병직 교수를 비롯한 뉴라이트 계열)은 군부독재의 서술 퍼런 통치도 긍정한다. 논리적으로 보면 일관성은 있다. 앞으로의 글들을 통해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글의 전개를 위해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간단히 정리를 해보자. 이영훈 교수를 필두로 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의 핵심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1. 민족보다는 '자유본성을 지닌 개인'을 주체로 역사를 바라보자.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이념과 공동체의식이 필요하다. 


2.  일제시대가 비록 억압과 차별의 식민시대였지만 근대문명을 학습한 시기이기도 했다. 1910년~1940년까지 조선의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3.6%를 기록했으며, 이러한 경제 발전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식민지 조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뉴라이트의 기본적인 주장이다. '뉴라이트'라는 이름을 떼어놓고 생각해보자. 그것이 중요하다. '민족주의'에 대한 입장은 다를 수 있다. 가령 일반적인 좌파들은 脫민족주의적 성향을 띤다. (굳이 좌파가 아니더라도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띤 사람들도 민족주의에 거부감을 갖는다) 물론 민족주의 좌파도 존재한다. 가령 NL이라든지. 필자가 뉴라이트라는 이름을 떼어놓고 생각해보자고 제안한 까닭은 정파적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면 필연적으로 '혼선'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얄궂게도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脫민족주의'를 선점한 까닭에 선량(?)한 脫민족주의자들의 입장이 난감해져버렸다. 민족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순간, 식민지 근대화론자들과 동급으로 취급되고 결국은 '친일파'로 귀결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만다. 이것이 정파적 시각이 갖고 있는 치명적인 한계이다. 그 어떤 소통도 숨 쉴 수 없게 만드는 밀폐된 감옥을 만들어 버린다. 




- <오마이뉴스> 에서 발췌 -


이야기가 조금 엇나갔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볼 때, 식민지 조선은 일제시대에 경제적 성장을 했다. '수탈론'은 그 경제적 성장의 이유와 배경을 살피는 반면, '근대화론'론 수치에만 주목한다. 발전이 됐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를 들어보면 어떨까? 아버지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가족들을 불러다가 무지막지하게 팬다. 인정사정 없이 주구장창 두들겨 패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당당하다. 집안의 살림은 나날이 풍족해지고 있으니까. 우리는 그런 아버지에 동의할 수 있을까? 


이렇듯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수치에 매몰되어 원인과 배경을 살피지 않고, 일제시대의 경제 발전을 높게 평가한다. (실제로 이들은 일제시대 쌀 수탈도 신화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군부독재시대도 긍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논리적으로 일관성을 갖추고 있다. 이승만도, 박정희도, 전두환도 집에 와서 가족들을 열심히 두들겨 패는 아버지였지만, 경제를 발전시켰으니까 된 것 아니냐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 <대전일보>에서 발췌 -


오로지 논리적 일관성을 놓고 볼 때,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100점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일제시대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 군부독재시대는 눈감아주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는데 흰 쌀밥을 마음껏 먹게 해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보릿고개의 추억담을 들려준다. 먹고 살게 해줬는데 그 정도의 '폭압'은 눈감아줘야 하지 않냐는 것이다. 그런 말씀을 하는 분들에게 '식민지 근대화론'을 들려주고 싶어진다. 경제를 발전시켜준 일본과 경제를 발전시켜준 군부독재.. 뭐가 다를까? 


두 가지 반론이 가능할 것 같다. 우선, 일제시대가 군부독재시대보다 훨씬 더 엄혹하고 잔악한 시절이었을 것이라는 주장. 그리고 일본놈들이 우리를 지배한 것과 같은 핏줄이 그런 것과는 다르지 않냐는 주장이 그것이다. 두 번째의 것은 논할 가치가 별로 없어 보인다. 결국 그런 주장은 '일본놈한테 당해서 자존심 상해'라는 말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행위'가 아니라 '주체'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은 같은 한국인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은 없어도 너무 없어 보인다. 


반면, 첫 번째 주장은 생각해볼 만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제시대가 군부독재시대보다 훨씬 더 끔찍한 시절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도 막연히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여러 가지 자료들이 그러한 가설을 무너뜨린다. 한홍구 교수는 『대한민국사 2』에서 독재정권이 더 악랄했다 - 서대문 형무소, 일제의 만행만 기억할 것인가 라는 글을 통해 박정희 시대의 악랄함을 고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밉보인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 부연하지 않아도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제대로된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가야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최소한 일제 시대에는 재판은 받을 수 있었다. 전두환의 삼청교육대는 또 어떠했고, 그 날의 광주는 어떠했는가? 


긴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 우리가 이 글에서 확인해야 하는 것은 '논리적 일관성'이니까. 일제시대를 긍정하는 사람들(식민지 근대화론자)은 군부독재시대도 긍정할 수 있다. 논리적 모순이 없다. 하지만 일제시대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군부독재시대에 대해서 찬양을 한다든지, 살짝 눈감아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먹고 살게 해줬으니까 그 정도 '폭압'은 괜찮다고 주장하려면, 일본의 식민통치도 긍정해야만 한다. 과연 이러한 논지를 밀고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혹, 그와 같은 모순을 끝까지 고수하는 사람들은 "패는 아버지도 괜찮다. 그가 한국 사람이기만 하다면." 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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