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묻는 입

이젠 더 이상 '삼점일절'의 충격 없는 3·1절이 되길..

너의길을가라 2014. 3. 1.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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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에서 발췌 -



Q1. "3·1절을 읽어보세요" 


적지 않은 중학생들이 3·1절을 '삼점일절'로, 3·1운동을 '삼점일운동'으로 읽었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지더군요. 기사가 나간 뒤 일부 네티즌들은 댓글에서 학생 인터뷰가 조작된 것 아니냐고까지 물으시더군요. 취재진이 중학생을 만나기 위해 서울시내 중학교 5군데를 돌아다녔고요, 20명 남짓 되는 중학생을 붙잡고 물어본 결과, 20%정도의 중학생이 3·1절 읽는 법조차 몰랐습니다. 차라리 조작이었다면 저도 좋겠습니다. 


Q2. "3·1절은 무슨 날인가요?" 


'일제에 항거해 1919년 3월 1일 벌어진 우리민족 최대 독립운동'이란 답을 딱 한 명이라도 해주길 기대했습니다. 저렇게 정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행히 '대한민국 만세'정도 기억하는 학생은 꽤 많았습니다. '독립운동'이라고 말한 학생들도 꽤 있었고요. 그런데 중고등학생을 막론하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학생도 적지 않았습니다. (사실 대한민국 만세도 엉뚱한 대답인데..)


'전범기가 뭐에요?' 기형적 역사교육의 심각함 SBS



제95주년 3·1절을 맞이했지만, 여전히 '삼점일절'의 충격은 가시지 않는다. 고작 1년도 지나지 않은 일이다. 위에 발췌한 내용은 지난 2013년 4월 SBS가 '청소년들의 역사교육 현실'을 취재한 기사의 일부(3·1절과 관련된 부분만 발췌)이다결과는 보시는 것과 같이 충격적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한국사는 그저 어렵고 머리 아픈 암기 과목이었다. '모험'을 감수하면서 한국사를 수능 선택 과목으로 선택할 학생은 많지 않았다. 역사교육의 현실, 그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나면서 여론은 들끓었다.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신채호 선생의 유명한 말씀이 서슬 퍼런 꾸짖음으로 다가왔다. 결국 정부는 한국사를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했고, 한국사 교육 강화에 힘을 실었다. 


사실 '3·1절'을 '삼일절'로 읽든, '삼점일절'으로 읽든 그것이 뭐 그리 큰일이겠는가?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알고 있느냐의 여부다.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SBS는 어문 규정을 어긴 셈이다. 3·1절은 이처럼 '가운뎃점'을 써야 함에도 3.1절처럼 온점을 찍고 있지 않은가? 물론 최근에는 가운뎃점과 온점의 사용이 엄밀히 구분되지 않고 혼용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언론의 문제가 심각한데, 가운뎃점을 쓰기가 번거롭고 귀찮다보니 온점으로 대체해서 표기하는 것이다. SBS의 실수를 감안하더라도, 3.1절을 삼점일점으로 읽은 것은 분명 충격적이었다. 단지 그것이 삼점일점이라고 읽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수의 학생들이 3.1절의 의미와 의의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것이다. 그렇다. 3·1절이 잊히고 있는 것이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1.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 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政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1.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을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 독립 선언문(기미 독립 선언문) -


1919년 3월 1일, 태화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는 손병희 · 이승훈 · 한용운 등 민족 대표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독립 선언문(기미 독립 선언문)을 발표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했다. 원래대로라면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치렀어야 했다. 일각에서는 만약에 있을 학생들의 희생을 피하기 위해 장소를 태화관으로 옮겼다고 주장하지만 선뜻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 독립 운동 지혈사』에는 '당시 만세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총 200여 만 명이며, 일본 군경에게 피살당한 사람은 7,509명, 부상자는 15,850명, 체포된 사람은 45,306명'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집회인수가 106여 만 명이며, 사망자가 7,509명, 체포된 사람이 4만 7천여 명이라고 한다) 학생들의 희생을 고려한 선택이라기엔 일제의 탄압은 '어차피' 무차별적이었다. 태화관에서 '조신하게'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민족 대표들이 행사가 끝난 후, 총독부 정부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잡아가시오'라며 자수를 했던 것을 미뤄보면 그 의미를 조금은 유추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민족 대표의 행방을 알 길이 없던 민중들은 원래 약속 장소였던 탑골공원에서 별도의 독립 선언식을 거행했다. 학생 한 명(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고, 그 자리에 모여있던 천 여명의 학생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윽고, 수십 만의 민중들이 합류했고, 그야말로 3·1운동이 펼쳐졌다. 이쯤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교과서 등에는 '대한독립만세'라고 외쳤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아마 당시의 민중들에게 더 익숙했던 국호는 '대한'이 아니라 '조선'이었을 것이다. 그 중에는 오히려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 않았을까? 물론 '대한'이든 '조선'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수십 만의 민중들이 간절히 바라 마지않았던 것은 단 한 가지, 민족의 독립이었을 테니까.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3월 1일부터 4월까지 계속됐던 3·1운동은 안타깝게도 실패했다. 당황한 일제는 더욱 강경하고 무지막지한 탄압을 가했다. 헌병과 경찰, 완전무장한 2개 사단이 전국적으로 진행된 3·1운동을 짓밟았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 시위자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물론 그 외에도 실패의 이유는 더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민족 대표의 수상한(?) 태도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의 엘리트 계층에 팽배해 있던 비현실적 낙관주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에도 이것이 조선의 독립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고 착각했던 점(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독립과는 무관)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의 독립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 상정될 기회가 없을 것이다. 유럽의 열강이나 미국이 조선의 독립을 지지해 일본의 심기를 건드릴 만큼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설령 독립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독립에 의해서 이득을 볼 준비를 갖추지 못하였다.


- 윤치호,『윤치호 일기』-


(친일파로 규정된) 윤치호는 당시 3·1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그가 내세운 '자치능력결여론'은 그의 친일 행각을 암시하는 것이긴 하지만, '조선의 독립 문제가 파리강화회의에 상정될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그의 정세 분석만큼은 정확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3·1운동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일제는 3·1운동을 계기로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치 방식을 '문화 통치'로 전환한다. 또, 3·1운동은 해외 각지에 퍼져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을 결속시키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다만, 제암리 학살 사건,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 사천 학살 사건, 대구 학살 사건, 합천 학살 사건, 남원 학살 사건 등 우리가 기억조차 못하는 수많은 죽음들이 가슴 아플 뿐이다.


- <국제신문>에서 발췌 - 


제95주년 3·1절을 맞이한 오늘. 사정이 조금은 나아졌을까? '삼점일절'의 충격은 더 이상 없는 것일까? 한국사가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면서 이런 일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물론 수능에 필수 과목으로 지정됐기 때문에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자발적인 관심이 생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진 않기로 하자. 그리고 학생들만 탓한 문제도 아니다. 서경덕 교수는 "가장 큰 문제는 무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스스로가 먼저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 스스로도 역사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져왔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보수단체, 3·1절에 교학사 역사교과서 판매 <뉴시스>


역사에 대해 모르는 것도 당연히 문제이지만, 더욱 심각하고 악질적인 문제는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리라. 한국사가 수능 필수 과목이 됐지만, 이 틈을 노리고 뉴라이트의 '교학사 교과서'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정부는 대놓고 '교학사 교과서 구하기'에 나섰고, 여당인 새누리당도 뉴라이트 역사관을 옹호하고 나섰다. 잘못된 역사 교육은 차라리 안 하니만 못한 결과를 만든다. 옆나라 일본의 우경화가 좋은 사례이지 않은가?


일본의 아베 총리와 그의 충복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망언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 정부는 그때마다 '발끈'하는 듯 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역사 왜곡에 대응한다기보다는 국민 눈치보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그럼 점에서 또 하나의 '적대적 공존 관계'가 형성된 셈이다. (적대적 공존 관계가 왜 이리도 많단 말인가!) 우환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3·1절을 맞아 스스로를 보수라고 주장하고 있는 각종 단체들이 '바른역사 독립을 위한 시민대회'를 연다고 한다. '치욕스런 친북자학사관을 떨치고 우리 역사의 독립을 선언'할 예정이라나? 아,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들의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삼점일점'의 충격이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다. 제95주년 3·1절은 오늘도 안녕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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